네줄 冊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 김사이 시집

마루안 2019. 3. 8. 21:42

 

 

 

기다렸던 시집이다. 김사이 시인은 단 한 권의 시집으로 내 가슴에 박힌 시인이다. 첫 시집에서 노동자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세상의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희망적인 몸짓이 인상적이었다. 쉬운 길로 그냥 묻어가지 않으려는 그녀의 반골 정신도 마음에 들었다.

거창하게 등단만 하고는 시 쓰기를 멈춰 잊혀진 시인도 있고 첫 시집 내고 영영 소식이 없는 시인도 있다. 한번 시인은 영원한 시인임을 증명하듯 시는 안 쓰고 잡문만 써서 시인이라는 이름표을 오래 울궈 먹는 사람도 있다.

김사이 시인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중견 시인과 혼동될 때가 있다. 처음 이 시인을 접했을 때도 김사인 시인의 받침을 뺀 실수가 아니었나 생각했다. 김사이는 구로노동자문학회 출신의 여성 시인이다. 노동자 출신답게 말랑말랑한 시를 쓰지 않는다.

첫 시집도 울림이 있었지만 이번 시가 훨씬 좋다. 이 시인의 문학적 고향은 여전히 구로공단과 가리봉동이다. 구로공단은 그녀의 본명인 김미순과도 어울린다. 김사이와 김미순 사이에서 줄을 타듯 시인과 노동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그녀는 시인이자 노동으로 밥을 먹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절박하고 처연하다. 그러나 삶이 궁하지는 않다. 절박해서 애틋하고 처연해서 아름답다. 기가 막히게 돈 냄새를 맡는 자본가와 개발지상주의는 구로공단과 가리봉동을 호적에서 파버렸다.

그들에게 이 지명은 빨리 지워야 할 가난의 상징일 뿐이다. 가리봉동을 지우고 디지털단지로 성형 수술을 했지만 여전히 그곳은 저임금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의 거주 공간이다. 노동과 거주지의 흐름도 생명과 같은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가리봉동은 중국 동포들이 모여든다.

시인은 공순이들이 떠난 가리봉동에 자리 잡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을 놓치지 않는다. 첫 시집에서 저임금 근로자의 애환을 예리하게 파헤쳤듯이 두 번째 시집에서도 여전히 노동자 친화적(?)이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차별 받는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때론 힘이 부쳐서 선동하듯 거친 문구가 눈에 띄지만 짙은 서정성으로 절묘하게 문학적 균형을 잡는다. 세상에 완벽한 체제는 없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라 거대 자본에 노동이 착취 당하는 현실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 끊임 없이 고발할 것인가.

시인이 다시 반성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사이의 시는 게으른 나를 각성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고 사람이 보이는 시집이다. 오늘 저녁 아무것도 안하고 이 시집을 읽었다. 시 읽는 내내 떨림과 울림이 교차한다. 시집을 기다렸던 보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