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역설적인 저녁 - 백인덕

마루안 2019. 1. 5. 21:59



역설적인 저녁 - 백인덕



세상 첫 날처럼
골목 끝을 질끈 밟았다.
희미한 눈발 사이
막 부여잡은 전봇대는 직립 그대로인데
추운 날,
낮술 탓인가,
뜨거운 얼굴로 쏟아지는 영혼의 파편들.
어린 고양이가 뺨을 핥고 떨어지고
몇 차례 졸업장이 목을 긋고 날아가고
몽땅 연필, 샤프와 청색 볼펜이 가슴팍에 꽂힌다.
빛의 속도로 날아와 머리를 쫙 쪼개는
나의 신앙,
나의 운명,
나의 헛된 고집들.


최후처럼 사는 삶은 없다.
시작이 아니라면 삶 또한 아니다.


눈은 남쪽에서 국제공항을 마비시켰다는데,
골목 하나 다 지우지 못하는 여기-지금,
불끈 발목에 힘을 주고
엉덩이 뒤로 빼고
손바닥에 혼(魂) 불어넣어
기면, 기어가면
매몰찬 물매로 들려 선 저 끝에 닿을 수 있을까?
딱 한 번 열리는 문을 밀고 들어가
소름 돋은 상처들
가지런히 뉘일 수 있을까?
세상 마지막 날처럼
밟았던 어둑한 골목 끝을 지그시 놓는다.



*시집, 짐작의 우주, 리토피아








변태(變態) - 백인덕
-나는 사는 게 두렵다



귀 잡혀 끌겨간 초등학교 입학식,
처음 본 만국기는 죽어라 펄럭였는데
울지도 못하고 누런 콧물만 빨아 먹다 연이틀
배앓이로 학교에 가지 못했다.
행복하고 달콤하게 빈둥거렸다.


발목이 다 드러나는 물려받은 교복을 입고
삼천 원 용돈에 팔려 혼자 찾아간 강변 중학교,
옆줄에 선 여자애들 등짝 줄무늬가
너무 희고 고와서 힐끔대다가
끝내 무섭고 불안하고 절망스러웠다.


목발 짚고 택시에서 내리니 멀더라, 체육관
계단에 주저앉아 스피커 소리 따라
푸른 베레모를 쓰고
교련복 명찰을 쓰다듬었지만,
영, 나랑 어울리지 않는 시공에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사는 게 두려웠다.


저녁을 먹고 아버지의 훈시가 끝나면 성경을 읽었다. 난 잠언을 특히 좋아했지만, 가끔 사도행전을 암송했다. 거룩한 저녁이 저물고, 밤늦어 키에르케고르를 읽었다. 카라멜처럼 녹아드는 밤, 영어사전과 한자자전을 양 옆에 펼쳐놓고, 정작 알 수 없는 암호로 미래를 타전했다. '바람은 벽에 닿기도 전 제 원소로 분열한다.' 생은 멀리 있었고 몸은 아팠다. 몸은 밀착돼 있었고, 기억은 몸을 버리고 있었다. 내가 먹은 약들은 몸이 아니라 기억의 저장고에 쌓이고, 몸이 살아나며 병은 깊어갔다. 병듦이 삶이라 생각했지만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몰랐다.


내 죄(罪)는 어디에 있는가?
할 수 없이 출석을 다 부르고 나면,
압화(壓花) 전시장으로 변하는 시간.
긴 더듬이를 만들 걸,
다시 목이 메고 최초의 멀더듬이로 자꾸, 자꾸 변태하는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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