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이자 - 박숙경
새벽이 와서 또 그렇게 달아나기를 몇 번쯤 하였을까
저, 읽혀지지 않는 표정과
아무 일 없다는 듯 반듯한 아침의 자세에
얼마의 불만이 필요했다
가끔, 흐트러지고 싶다는 꿈이 생기곤 했다
꿈과 불안이 함께 자라났다
딱 한 번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빛바랜 시간 위에 손을 얹는다
생의 하이라이트가 어둡게 지나갔다
새로이 켜지는 종소리에 귀 기울이는 오후
아주 나쁨의 미세먼지들이
귓불 주변에 둘러앉아 뿌옇게 두런거린다
익숙하지 않는 과도기
내가 아닌 모든 것들을 나머지라 했던 과거를
삭제하기로 했다
어제 버렸던 햇빛이 돌아오는 시간까지
밀린 원리금을 준비해야 한다
창 너머의 겨울 햇살은 층층이 불어난 이자처럼
과장 없이 반짝였다
채널을 돌려도 기막힌 승부수와 눈 예보는 없다
*시집, 날아라 캥거루, 문학의전당
겨우살이 - 박숙경
여기까지 왔습니다
겨우 살아냈다고 말하고 싶은데 꾸욱 참습니다
보증금은 맡겼는지 월세는 주었는지 가물거립니다
사는 게 죄라고 말해버린 누군가가 있더군요
나도, 당신도 죄목은 같습니다
무단침입죄, 내가 알 바는 아니라며
은근슬쩍 엉덩이부터 디밀어봅니다
창백해진 낮달 잠시 걸터앉았다 갈 뿐
그 사이 한티재 한 바퀴 돌아온 높바람이
혓바닥 쏘옥 내밀고는 꽁지 빠지게 달아납니다
친구라고는 적막뿐입니다
올겨울, 주머니 두둑해야 곁방살이 면할 터인데
얼굴에 녹슨 철판 다시 한 번 덮어쓰고
눈물 같은 것 추방해버린 지 오래라고 짐짓 우기며
이 겨울, 겨우 또 살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삭풍과 삭풍 사이, 잴 수 없는
내 아둔한 요량으로는 억만 광년쯤이나 될 듯합니다
내 마음의 여기에서 그 마음의 거기까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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