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이진명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첫 여자도 첫 키스도 첫 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얼마나 눈부신가.
안 돌아오는 것들
다시는 안 돌아오는 한 번 똑딱한 그날의 부엉이 눈 속의 시계점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그때는 몰랐다
안 돌아오는 첫 밤, 첫 서리 뿌린 날의 새벽 새 떼
그래서 슬픔과 분노의 흔들림이 뭉친 군단이 유리창을 터뜨리고
벗은 산등성을 휘돌며 눈발 흩뿌리던 그것이
흔들리는 자의 빗줄기인 줄은
없었다. 그 이후론
책상도 의자도 걸어 논 외투도
계단도 계단 구석에 세워 둔 우산도
저녁 불빛을 단 차창도 여행을 가서 안 돌아오고
없었다. 없었다. 흔들림이
흔들리지 못하던 많은 날짜들을 스쳐서
그 날짜들의 어두운 경험과
홀로 여닫기던 말을 문마다 못을 치고 이제
여행을 떠나려 한다
흔들리지 못하던 나날들의 가슴에 금을 그으면
놀라워라. 그래도 한 곳이 찢어지며
시계점처럼 탱 탱 탱 피가 흐른다
보고 싶은 만큼, 부르고 싶은 만큼
걷고 걷고 또 걷고 싶은 만큼
흔들림의 큰 소리 넓은 땅
그곳으로 여행 가려는 나는
때로 가슴이 모자라 충돌의 어지러움과
대가지 못한 시간에 시달릴지라도
멍텅구리 빈 소리의 시계추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자꾸 틀린 말을 하더라도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민음사
봄밤 - 이진명
반쪽 몸이 불편한 주인집 할아버지
바깥마루에 나와 앉아
담뱃불 긋는다.
깊이 봄밤을 빨아들인다.
세 살짜리 손자보다 걸음 못 걷는다고
할머니한테 가끔 지청구받는 할아버지
밤하늘에 홀로 나와 불붙인다.
유난히 센 은발에 불꽃 어룽인다.
떨리는 손으로 불꽃 받쳐들고
일찍이 멈춘 반쪽 몸 헤아리는지
다시 봄밤을 깊이 빨아들인다.
소용없는 몸의 반쪽을 봄밤에 내다 판들
어느 캄캄한 꽃눈이 사려 할까
은발이 커다랗게 그림자 이룬 속으로
몇 대의 불꽃 이제 다 졌는지
정적이 일으키는 숨소리 길다.
마루문이 한참을 흔들리다가 힘겹게 닫힌다.
문간방에서 늦도록 돌아누우며 나는
주인집 할아버지의 불꽃놀이를 끝까지 그려 간다.
봄밤에는 처녀인 나도 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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