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 류근
내게 아무런 기쁨 없으니 나무들은 저희끼리
한 시절의 잎사귀를 불렀다 흩어놓고
몇 번씩 비가 내리는 저녁이 와서
더욱 캄캄해진 귀를 막게 했을까 세상에 오지 않는
노래와 약속들은 아프고 아무 데서나
쓰러지고 싶었던 나날들은 내게도 고통이었을 테지만
이젠 어쩔 수 없고 어쩔 수 없음으로 하여
나는 더 멀리 길 바깥으로 떠밀려간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서는 모든 것들이 뚜렷해서
귀를 막지 않아도 내 고통이 잘 들리고
잘 자란 벌레처럼 울 수도 있었을 것이므로
점점 더 깊은 곳에 나는 나를 버려두는 것이다
불타지 않는 기억들을 집으로 지은 사람답게
함부로 생애의 알 수 없는 힘들을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의 길과 빗방울이 오는 길과
시간이 흘러가는 길을 그 바깥에서
파랗게 볼 수 없다는 것이 무슨 괴로움이 되리
생애는 그런 것들과 영혼을 바꾸지 않아도 멀리 흐르고
아주 가까운 곳에 상처들은 무궁한 뿌리를 드리운다
거기 몸 박고 꽃을 피우면 이윽고 어쩔 수 없는
나날들이 오고 저녁이 와서 눈 뜰 때마다 더 멀리
더 멀리 떠밀려 가 있는 잎사귀와 만나고 나는
구름의 생멸보다 잦고 흔한 고통과 만나게 될 것을
*시집,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폭설 - 류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한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 류근 시인은 1966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충북 충주에서 자랐다.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상처적 체질>, <어떻게든 이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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