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일억 년의 고독 - 고진하

마루안 2019. 1. 3. 21:28



일억 년의 고독 - 고진하



공룡도 꿈이 있었다면
이런 건 아니었을 거야.
고만고만한 섬들 화염(火焰)처럼 떠 있는 다도해
붉은 저녁놀을 배경으로
희미한 발톱자국 발바닥자국이나 남기는 건 아니었을 거야.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딱밭골 해안,
끝없이 밀려드는 거친 파도와 뙤약볕에 씻기며
검은 퇴적암에 음각(陰刻)된
일억 년 조물주의 고독.
(내가 그이는 아니지만
그이의 고독이 사무쳐왔어!)
큰 발자국들은 맷돌짝만하고
작은 발자국들은 막사발만한데,
갑자기 어디서 출몰했는지 뻘뻘대며 기어 나온
내 새끼발톱만한 갯강구들,
물 괸 공룡 발자국 화석들 주위로
수백 마리씩 우르르우르르 몰려다니며
고독의 무도회를 벌였어.
(그이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난 위로를 받았어.)
그렇게 뻘뻘대며 현란한 스텝을 밟아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자 않는
다족류의 갯강구들,
공룡 이후 최대의 대식가 인류가 사라져도
무도회를 열겠지.
철썩철썩 밀려드는 다도해 파도 소리에 맞춰
화석으로 화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또 다른 지구별 여행자들과 함께....



*시집, 수탉, 민음사








유목 - 고진하



태양의 얼굴에 황사가 누런 분칠을 하는 동안
세탁소 집 담벼락 아래 편
앉은뱅이 민들레, 누가 그 얼굴을 씻겼는지 해맑다


나는 잠시 무거운 배낭을 벗어놓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한해살이 생의 심연(深淵)을 들여다본다


비와 바람이 찢어놓고 간 잎새와 줄기의
선연한 상처, 뭐 먹을 게 있다고 그 상처에 매달린
개미 떼, 언젠가 그 미묘한 공존의 끈을 놓고
홀씨 되어 훌훌 떠날
샛노란 얼굴 앞에서
나는 시심(詩心)의 먼지를 털어낸다


나보다 더 진화된 물건이니
내가 저를 들여다보고 중얼대는 줄 모를 리 없겠으나
원치 않는 황사가 분칠을 씻은 것은
알고 보니, 세탁소에서 흘려보낸 오수(汚水) 덕분이다


아무리 더럽더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길 없는 길을 찾는 이의 삶임을 웅변하지만,
악취 풍기는 오수에 내 유목을 맡길 수 없어
바람에 떠오르는 홀씨처럼 담벼락 밑을 떠난다


후둑, 후두둑--
갑자기 머리 위로 굵고 누런 흙비가 떨어진다
하늘 세탁기가 회전을 시작한 모양이다






# 고진하 시인은 1953년 강원도 영월 출생으로 감리교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수탉>, <거룩한 낭비>, <꽃 먹는 소>, <명랑의 둘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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