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돈맛을 좀 아시나 - 박형권
돈맛을 아시나
남해바다 멸치처럼 씹어도 썹어도 국물이 나오는
마법 같은 그 맛을 아시나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서 과메기 빼어 먹듯
항상 마지막 돈을 쓰는 나에겐
돈맛이 약간 비리지
어물전에서 돈맛을 좀 아는 이들의
토론을 들었어
나는 세 마리 만원 하는 고등어를 네 마리 달라고 흥정을 붙였는데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함박눈 내리며 일진광풍이 불며
한 여자가 자가용에서 내렸어
이건 돈 쓰는 것도 아니라는 듯
동죽도 사고 주꾸미도 사고 병어도 사고 참조기도 사고
펄떡이는 오대양 육대주도 상자째 사더니
자기앞 수표를 꺼냈어 돈에 이미 이력이 난 어물전 주인은
대가리를 쳐내고 지느러미를 자르고 돈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어
내가 노린 물간 고등어가 고독해 보이는 늦은 저녁이었어
꽁치 꼬리 집어 올리듯 집게손가락으로
거스름돈을 받다가 여자가 짜증을 냈어
-에익, 돈에서 냄새가 나, 다른 돈으로 줘
-하하하, 돈맛을 아시는 분이 왜 이러세요 냄새나는 돈이 싱싱한 돈입니다 찢어보세요 피가 날 겁니다
윽! 돈맛이란 피맛이었구나 그래서 비렸구나 주꾸미에게 피 빨린 듯
헬렐레 맥이 풀려 돌아왔어
그대 돈맛을 좀 아시나
*시집, 도축사 수첩, 시산맥사
고독사 전문 - 박형권
한 독거노인이 고독사한 것은 신문에 나오지 않았다 신문도 언젠가는 고독사할 것이고 기사를 적지 않은 기자도 필연 고독사할 것이기 때문, 틀니 하나가 유리컵에 담겨 있었는데 독거노인은 자다가 죽으려한 것 같다 잠자기 전에 틀니를 뽑아 두기 때문, 틀니가 목에 걸려 질식사하는 것보다 고독사가 편안하기 때문, 세상에 혼자 나왔으므로 혼자 허공 비우는 것 너무나 당연하다 고독하기 위해서는 모두 곁을 떠나야 하는데 아날로그 TV, 타다만 양초, 구멍난 양말과 나른한 잠옷은 독거노인을 지키고 있었다 쓰레기통에는 수북한 고독! 독거노인은 한때 유품정리사였다 그리고 고독사 전문이었다 냉장고에 붙은 레시피에는 늘 혼자 밥 먹는 법이 따라다녔다 독거노인은 정리하고 정리하다 알몸으로 떠났다 부숭부숭한 털도 가리지 않은 채, 몸 잘 개켜서 윗목에 밀쳐 둔다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고독사는 고독을 떠나는 것 아마 흩어진 음모로 콧구멍 간질이듯 허 허 허 웃으며 고독에게 엿 먹이고 떠나려 한 것 같다
그러나 고독 한번 해보라 자정이 지난 순대국밥집에서 육젓새우를 털어 넣고,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나갔을 때, 오래된 라디오가 모든 죽음은 고독사라고 말할 때
고독 한번 해보라
# 박형권 시인은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나 가덕도에서 유년을 보내고 마산에서 학업했다. 경남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6년 <현대시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우두커니>, <전당포는 항구다>, <도축사 수첩>, <가덕도 탕수구미 시거리 상향>, <새로움에 보내는 헌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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