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례역 - 방민호

마루안 2018. 12. 30. 20:01

 

 

구례역 - 방민호


이곳은 사내의 옆구리 같다
향기도 악취도 없이 혼자서 텅 비어 있는 옆구리
그 옛날 영등포역에서 그이를 만난 후
옆구리에서 옆구리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빛이 없었다 종착역이 없었다
그이는 커다랗게 화장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봤는데
왜 나를 붙잡지 않았을까
그이는 옆구리처럼 고요했다
구례역은 이토록 고요한데
노란 불빛 점점 들어
나를 일구팔사 년으로 데려간다
그때 내가 다르게 살 수 있었을까
빙어의 옆구리 같은
그이의 옆구리를 끌어안았다면
어느 종착역에 내릴 수 있었을까
오늘밤 이 멋진 케이티엑스에서
일구팔사 년의 쇠바퀴 소리가 난다
파라솔 든 창녀들이 철길을 가로지를 때
나는 궤도도 모르면서
내가 탄 기차만을 사랑했다
구례에서 남원
그 다음엔 익산
그 다음엔 바다, 고기잡이 배 점점황으로 피어 있는
내일은 내 텅 빈 옆구리에
비로드 천으로 빚은
황모란 꽃 피리


*시집, 숨은 벽, 서정시학

 

 




새벽 소식 - 방민호
-김근태에게 바침


추산동 근처에서 그를 보았다
4.19 탑에서 연설하고 있던
그는 말이 어눌해서 좋았다
뒤틀린 몸으로 창동 네거리에
서 있는 그가 좋았다
그토록 모진 고문을 받고도
영혼을 깨끗이 지킨 것이 좋았다
목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그는 늘 넥타이를 맸다
눈동자는 늘 푸른 하늘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시계는 겨울
새벽 다섯 시 반
내가 새로 깨어난다
슬픔 속에서 내가
착한 사람이 된다


*2011년 12월 3일 마산에 이선관 시세계를 조명하는 학술모임에 다녀왔다. 그해 12월 30일에 김근태 님이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