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을 자초하다 - 조항록
그는 무슨 협회나 단체의 회원이 되지 않았다
어떤 동호회나 계모임의 일원도 거부했다
꼭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닌데
누구의 기념회나 경조사에 나가
반갑다 안됐다 축하한다 지저귀느라
밤거리를 헤매 다니지 않았다
누구의 생일 따위는 마치 자기 일처럼 안중에도 없었다
어느 선생은 그런 것을 품앗이라고 했는데
좀 더 솔직히 정치요 사회요 일종의 문화라 했는데
그러고 보니 훗날
아이들의 썰렁한 결혼식과 육친의 텅 빈 장례식에서
폭죽을 터뜨리거나 졸음을 참아내는 인정은
그의 호사가 아닐 것이다
일찍이 이렇다 할 정파와 종파에도 속한 법이 없으므로
홀로 취하고 홀로 기도했으니
넓은 바다에 무인도처럼 발이 묶여 홀로 떠다닐 것이다
갈매기 떼가 날갯짓을 해도 손짓은 아닐 것이다
*시집, 여기 아닌 곳, 푸른사상
회자정리 - 조항록
이미 여러 차례 그가 전화를 했으나
나는 응하지 않았다
그날들에 대해 히죽거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오늘에 대해 울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로부터 삼 년째 그는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기억하는 남남이 되었다
# 며칠 전 예전에 동호회 활동을 했던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밤 9시가 넘은 시각이다.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데 연속 두 번이나 전화를 하기에 받았더니 그 사람이다. 그쪽에서는 무척 반가워했으나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별로다. 연락 끊긴 지 10년이 다 되었는데 아직도 내 전번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해마다 연말이면 연락처 다이어트를 하면서 지웠던 번호다. 딱히 그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불필요한 인맥을 맺고 싶지 않아서였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전화를 끊었는데 미안하게도 그의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다. 스스로 고립 작전이다. 나의 인맥 다이어트는 많이 날씬해졌어도 계속된다. 빡빡한 인맥경화보다 홀가분한 외로움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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