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품 늦가을 - 홍신선
이 시절 스캔들 하나 없는 나날이란 맹탕이 아니냐고
일탈 없이 굴러온 생이란 떨그럭대는 찌그러진 깡통 아니냐고
때 아닌 늦가을 웃비 가고 난
이제도
자폭인 듯 길옆 배수로 물 고인 진창으로 뛰어내리는 치들이 있다.
짓이겨지고 흙탕물 뒤집어써도
툭, 툭 무작정 뛰어내리는
낯꽃 꺼진 중고의 녹슨 낙엽들
그래도 외따로 내가 이 한철을 옆에 끼고
질탕하게 노는 것은
저 11월 하늘가에 자우룩이 뜬,
뭇 나무에서 쓰나미 덮친 듯
큰 사태나 쏟아지는 일탈과 스캔들 때문이다.
*시집, 삶의 옹이, 문학선社
버지니아 울프는 세월을 읽는다 - 홍신선
늦여름 저녁의 하늘 끝
구름들 붉은 도랑물 속에서
이웃집 또래들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잡으려 했던,
아무리 양 손아귀에 힘껏 움켜쥐어도
씨알 굵은 미꾸라지처럼 미끈미끈 빠져나간
내 어린 날 그것은
자(尺)짜리 시간이었구나 지나가는 삶의 짧은 꼬리였구나
신도시가 된 고향에서 다시 보는
고층 아파트 단지 먼 뒤쪽
뭉개진 채 토막토막 걸린 구름 몇 명
그렇다 로드 킬처럼 저 누더기 헌 몸 한 벌씩 벗어놓고
총총히 그 코흘리개들 어디로 갔나
아직도 손안에는 부걱부걱 해금내, 미끈거리는 허망이 남았는데
그 때마다 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뜨끈한 그것은 비애인가
놓친 뒤에 비로소 움켜쥔
아 그리 마음에 불 지른 적막인가.
# 홍신선 시인은 1944년 경기도 화성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서벽당집>, <겨울섬>,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바람 속에서>, <우연을 점찍다>, <자화상을 위하여>, <삶의 옹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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