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밤 화성시의 궁평항 - 황동규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맘때가 정말 마음에 든다.
황혼도 저묾도 어스름도 아닌
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
바다 전부가 거대한 삼키는 호흡이 되고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원지로 가는 허연 시멘트 길이
검은 밀물에 창자처럼 여기저기 끊기고 있었다.
기다릴 게 따로 없으니
마음 놓고 무슨 칠을 해도 좋을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이 냄새,
밤새 하나가 가까이서 끼룩댔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혼자 있어서 홀가분한 이 외로움.
외로움 아닌 것은 하나씩 마음 밖으로 내보낸다.
속에 봉해뒀던 사람들은 기색이 안 좋지만
하나씩 말없이 나간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 비울 게 없으면 시간이 휘는지
방금 읽고 덮은 휴대폰 전광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선창에서 배 하나가 소리 없이
집어등을 환히 켰다.
*시집, 겨울밤 0시 5분, 현대문학
가을날, 다행이다 - 황동규
며칠내 가랑잎 연이어 땅에 떨어져 구르고
나무에 붙어 있는 이파리들은 오그라들어
안 보이던 건너편 풍경이 눈앞에 뜨면
하늘에 햇기러기들 돋는다.
냇가 나무엔 지난 여름 홍수에 실려 온
부러진 나뭇가지 몇 걸려 있고
찢겨진 천 조각 몇 점 되살아나 팔락이고 있다.
쥐어박듯 찢겨져도 사라지기 어렵다.
찢겨져도 내처 숨쉰다.
검푸른 하늘에 기러기들 돌아온다.
다행이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놈은 아직 없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하루도 아직은 없다.
오늘은 강이 휘돌며 모래 부리고 몸을 펴는 곳
나그네새들과 헤어진 일 감춰둔 곳을 찾아보리라.
# 독특한 제목이 인상적인 이 시집은 2009년에 초판이 나왔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은 2012년 6월에 나온 5쇄 본이다. 어찌 된 건지 얼마전에 서점에서 이 시집이 현대문학에서 문학과지성으로 바꼈음을 알았다. 아직 현대문학사는 건재하건만 무슨 이유가 있을까. 미처 떠나지 못한 철새의 날갯짓이라도 들리는 듯 시집을 들추다 옛 추억이 외로움으로 밀려오는 겨울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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