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떤 오후가 끝날 무렵 - 강재남

마루안 2018. 12. 6. 20:00

 

 

어떤 오후가 끝날 무렵 - 강재남


유독 무덤가에서 누구에게 무례하다 누구에게 친절하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 늙어야하고 태양은 죽지 않아야 한다

오후에 나는 늙었고 태양은 죽지 않았으므로 신경안정제 한 움큼 털어 넣는다 물푸레나무가 한 뼘 자란다

물푸레나무는 철학적이어서 어떤 물음과 대답이 공존한다 불규칙한 무늬를 입은 상냥한 그 여자, 입술이 붉다

입술에서 입술로 환승하는 나는 요망스런 계집, 아무도 죽지 않은 무덤에서 편지를 쓴다 마른 꽃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죽은 이름을 불러야할 이유는 없다

상냥한 그 여자와 여자들 입술이 부풀고 부푼 입술에서 뒷담화가 핀다 아름다운 생장력을 가진 치명적인 꽃,


꽃잎을 뜯어 혀에 심는다 오후에 나는 늙었고 태양은 죽지 않았으므로 햇살 한 움큼 털어 넣는다 붉은 꽃술에 혓바늘이 즐비하다


*시집, 이상하고 아름다운, 서정시학

 

 

 

 

 

 

그믐 - 강재남


한 생이 가는가보다 기약 없는 바람이 저리 울어대는 걸 보니

나무는 빈 몸으로 매운 날을 건너고

달을 삼킨 고양이가 달을 닮아간다

한 때 달이었을 나도 달의 기착지에서 방황하는 고양이였으면

그렇다면 그곳에서 길을 잃어도 좋았을 일,

장난감 기차는 뛰뛰 떠나는데 달을 삼킨 고양이를 목격한 내 침묵이 달콤해진다

한 생이 바람에 쓸려가는 하필 이런 날

눈물은 자란다 눈물이 투명한 건 슬픔을 들키지 않겠다는 의지란 걸

여자를 묻고 온 날 여자에게서 배운 일이다

저물어가는 저녁을 우두커니 보내고 함께할 사람이 없다

하늘이 텅 비었다


 


# 강재남 시인은 경남 통영 출생으로 2010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이 첫 시집이다. 여성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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