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투망을 던지며 - 문동만

마루안 2018. 12. 6. 19:30



투망을 던지며 - 문동만



어떤 병은 속에 숨기고 아껴 고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투망을 던진다


오늘은 난파한 배와 편대로 유영하는 로봇물고기와
유령처럼 사라진 녹슨 잠수정이 잡혔다


갖은 비웃음으로 새어 나가는 비밀이
다급할수록 그물 속에서 파닥거리는 날렵한 거짓말들이
순식간에 그물 속에 가득 찼다


여기는 믿지 못하는 걸 믿지 못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병동이며
믿음의 강요는 사교(邪敎)의 영원한 형식이며


이 그물을 또 어디에 던질까
구럭은 벌써 무거운데


깨지지 않던 신묘한 불빛들과
어떤 내상도 외상도 없는
가여운 젊은 시체들은 녹슨 배를 떠나지 못했으므로


누군가는, 혹은 누구나 알고 있었으리라


물리학을 죽였지만 언론학을 포섭했지만
남았다, 메스를 든 해부학이
부릅뜬 심해어들의 눈동자가



*시집, 구르는 잠, 반걸음








털이 세는 밤에 대하여 - 문동만



우연히 아는 사내를 만났다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나보다 두어 살 많은 소방관
칠월의 타는 햇살 아래 그의 눈썹은
무엇에든 달관한 노인의 눈썹처럼
몇 가닥 허옇게 세어 뻗쳐 있었다
그는 보여줄 순 없지만 아래의 털들도
허옇게 세어가고 있다고 웃었다
우리가 털에 대한 이야기로 날밤을 샌다면
흰 털들이 몇 가닥 일어나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웃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얀 밤이란 털이 세는 밤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내는 늙은 태를 나에게 남기고 주름진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밤낮을 바꿔 사는 사람들의
눈꺼풀에겐 다른 이름이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교대해주지 않는 시간
무너지지 말아야 할 스물네 시간을 더듬다 보면
자잘한 저 눈주름이란 지친 원심력들의 외상
저 눈썹이란 처마 아래서
까만 눈동자들이 열렸고
쉼 없이 생육의 시간을 물어 바쳤으니
우리는 저렇게 늙어만, 늘어만 간다
싱싱했던 검정을 잃고 흰빛의 외로움을 얻으며
털들만 분연히 제 생에 항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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