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먼 날 - 김시종

마루안 2018. 12. 6. 19:46



먼 날 - 김시종



언제 적 일이었던가.

내가 짧은 매미의 생명에 놀랐던 것은.

여름 한철이라 생각했는데 사흘 생명이라 듣고서

나무 둥치 매미 허물을 장사지내며 다닌 적이 있다.

먼 옛날 어느 날의 일이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창 무더위에 소리 높여 우는 매미 울음소리를

나는 조심스레 듣게 됐다.

한정된 이 세상에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존재가

심려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겨우 스물여섯 해를 살았을 뿐이다.

그런 내가 벙어리매미의 분노를 알게 되기까지

100년은 더 걸린 듯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 몇 년이 더 지나야

나는 이런 기분을 모두에게 알릴 수 있으려나.



*시집, 지평선, 소명출판








당신은 이제 나를 지시할 수 없다 - 김시종



난 당신의 집요한 애부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다.

10년인가 예전부터

난 분명히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이 확실하며

적어도 어른이 됐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당신의 그러한 터무니없는 포용력은

바다도 산도 한 아름으로 안고

나를 거꾸로 안으며 놓아주지 않는다.


눈에 비친 모든 것이 이상하며

작은 돌 한 개에조차

내 정수리는 바로 뾰족해져 버린다.

어떠한 것도 믿을 수 없는 채로

나는 결국 불균형하게 자랐다.


이 손은 아직 사람의 온기를 알지 못하며

얼굴은 여전히 경직된 채로

눈은 경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이대로라면 나는 아직 누군가를 죽여야만 할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당신의 사랑에 중독돼 있다.


나는 진정 당신을 떠나고 싶다.

이 땅을 천천히, 양 발로 힘껏 밟고서

산 너머 물을 마시러 가보고 싶다.

그리고 우러러 보기만 했던 하늘의 깊이를

콸콸 넘쳐 나오는 샘물 밑에서 내 자신을 헤아려 보고 싶다.

소나무 바람은 앉아서 들릴 것이며

똑같이 고갯길을 넘어 오는 사람에게는

내 불신도 따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간주해 생각해 보자

필요 없어진 애무의 뒤처리를 생각하자.


애무의 보답은 애무여야만 한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의 선물에 답례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저 당신은 역사의 위에서만 머물렀으면 한다.

당신은 이미 나를 지시할 수 없다.

우리 마음의 왕래에 감찰을 할 수 없다.

우리의 언약은 이미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테니

당신은 그저 내 시고(詩稿)에서만 숨 귀면 된다.


아버지와 자식을 갈라놓고

엄마와 나를 가른

나와 나를 가른

'38선'이여,

당신을 그저 종이 위의 선으로 되돌려주려 한다.






# 김시종 시인은 1929년 부산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자랐다. 1948년 4.3 항쟁에 참여했다가 이듬해 1949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오사카 조선인촌에서 살며 1950년무렵부터 일본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66 년부터 오사카전문학교 강사 생활을 했다. 2011년 <잃어버린 계절>로 41회 다카미준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지평선>, <일본풍토기>, <장편시집 니이가타>, <이카이노시집>, <화석의 여름>, <경계의 시>, <잃어버린 계절> 등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고품 늦가을 - 홍신선  (0) 2018.12.06
어떤 오후가 끝날 무렵 - 강재남  (0) 2018.12.06
투망을 던지며 - 문동만  (0) 2018.12.06
성적표 - 한우진  (0) 2018.12.05
물결무늬 사막 - 김중식  (0) 2018.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