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 - 한우진
1956년 딸을 낳았다
1958년 둘째 딸을 낳았다
1959년 셋째 딸을 낳았다
1961년 넷째 딸을 낳았다
1962년 다섯째 딸을 낳았다
1964년 여슷째 딸을 낳았다
1966년 아들을! 낳았다
1969년 막내딸을 낳았다
살얼음이 지핀 돌 더미에
멀리 떨어진 자식들 아궁이에
예배당에
불을 지피며
그 어떤 것에든
그을리며
팽나무가 덮친 집에서 여자는 혼자 산다
*시집, 지상제면소, 책나무출판사
처방(處方)* - 한우진
뽕나무밭이 퍼지려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파리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업어갔을 거라
도망쳤을 거라
눈 밟는 소리를 내며 이파리들이 뒤척였습니다 달이 어머니 발등에 달빛을 털어댔습니다 깨금, 산초는 아랫목에서 말라갔습니다 어머니의 오디 같은 젖과 무릎을 내 잠이 놓쳤을
때 뽕나무밭에서 바람이 몰려왔습니다 도망쳤을 거라 업어갔을 거라 아버지는 문마다 문풍지를 덧발랐습니다
구름이 짓밟은 세월, 아버지는 떠도는 일로 충만했습니다 물방울은 천근만근, 어머니는 낮보다 밤이 훨씬 더 고단했습니다 물은 어둠의 가루를 반죽하며 연못으로 스몄습니다 업어
갔을 거라 도망쳤을 거라 구름은 아버지의 처방, 반죽은 어머니의 처방, 공기의 딸들은 뽕나무밭에서 속옷을 벗어던졌습니다
도망쳤을 거라
업어갔을 거라
뽕나무밭이 넘실대려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파리들이 차근차근 물방울을 모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삶을 견디기 위한 자신의 처방을 갖는다. -니체, 1876년
# 이 시를 읽으면서 탄성을 질렀다.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이 담겨 중년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신다. 내 어미처럼 평생을 문맹으로 산 인생도 우주를 품고 산다. 그러고 보면 모든 인생이 다 거기서 거기다. 오늘 샤워 후에 생식기를 내려다 볼 참이다. 팍 쪼그라든 거기서 내 전생이 보일까? 아직 그곳에 오래된 미래로 헤엄치는 짐승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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