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일본적 마음 - 김응교

마루안 2018. 10. 21. 19:42

 

 

 

몇 명의 일본인 친구가 있다. 나는 일본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친일파다. 이 책도 그런 마음으로 읽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일본에 대한 미움은 일본 사람을 경험하면서 점점 사그러들었다. 몇 번의 일본 여행에서 일본을 좋아하는 마음이 굳어졌다.

요즘 일본의 극우 인사와 아베 총리의 발언은 마음에 들지 않으나 일본 문화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일본적 마음>이라는 책 제목이 참 좋다. 내용도 실제 일본에서 공부하고 밥을 벌었던 경험과 사색에서 우러나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한다.

책을 읽으면서 그래 맞아, 어쩌면 내 생각과 이렇게 같을까 등 내내 공감이 가는 내용을 따라 가며 흥미롭게 읽었다. 첫장에 실린 와비사비 미학은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내가 영국에 살 때 윗층에 살았던 일본인 커플도 그랬다.

가난하리만치 검소하고 일상이 소박했다. 조용한 커플은 공동 주방과 화장실에서 사용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마주칠 때마다 그들이 건네는 상냥한 인사와 미소도 친밀함이 생기게 했다. 깔끔하고 조용하면서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심이 가득했다.

와비사비 미학과 함께 배앓이 약인 정로환의 정체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때 나를 열광하게 했던 후쿠사이의 우키요에와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도 이 책을 통해 더욱 생생하게 느꼈다. 몰랐던 것에는 탄성을, 알고 있던 것은 새롭게 다지는 계기였다.

이 책에서 가장 인싱 깊은 장은 <사쿠라에 대한 명상>이다. 저자는 벚꽃과 사무라이를 열결시킨다. 벚꽃과 사무라이는 너무나 이질적이면서 한편 한묶음으로 통한다. 내가 일본을 좋아하게 된 것도 명예를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무라이 정신이다.

우리는 벚꽃을 좋아하면서도 왜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벚꽃을 일본꽃이라고만 생각을 하니 우리 고궁에서는 봄에 벚꽃을 볼 수 없다. 그러면서도 국회의사당과 국회 주변엔 봄이면 벚꽃 축제를 연다. 이미 죽은 왕조의 궁궐에 있던 벚꽃은 모조리 뽑았으나 현재 입법부의 중심인 국회는 벚꽃 천지다. 일본의 國花는 벚꽃이 아니라 국화(菊花)다.

벚꽃과 사무라이는 절묘하게 어울린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여러 가지 있겠으나 나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과 노회찬 의원도 이 부끄러움 때문에 앗사리(あっさり, 깨끗이) 죽음을 택했다.

자살을 찬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모르고 구질구질하게 살거나 부끄러움을 견디며 시름시름 앓다 죽는 것보다는 낫다. 내가 10대 때 어디선가 읽고 강렬한 인상을 받은 내용이 있다. 어떤 홀아비가 아들 하나를 키우면 산다.

어느 날 가게 주인이 아들의 멱살을 잡고 아버지에게 온다. "당신 아들이 떡을 훔쳐 먹었소." "내 아들은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 그래도 가게 주인은 자기가 분명 떡을 훔쳐 먹는 것을 봤다고 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는다. "정말 떡을 훔쳐 먹었느냐." 아들은 울면서 훔쳐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아들을 죽여 위를 반으로 갈라 가게 주인에게 보여준다. 나는 열대여섯 살 무렵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전율했다. 당시 그 아버지가 잔인했다기보다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 그 구절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 내용이 일본 무사도의 경전인 하카게(葉陰)에 나오는 구절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 나라의 정신 문화가 하루 아침에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민속박물관에 가도 사무라이 복장 모형은 꼭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인은 만개한 벚꽃에서 죽음을 떠올린다고 한다. 내 생각도 그렇다. 내가 <게이샤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여러 번 본 것도 이 벚꽃 지는 장면이 죽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때론 인생이 지는 벚꽃처럼 허무하기도 하지 않던가.

 

이 책은 일본을 찬양하는 책은 아니다. 일본에서 공부했고 살기도 했던 저자가 있는 그대로의 일본 문화를 기술한 것뿐이다. 일본을 이해하는데 좋은 책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읽은 외국 책도 일본인 작가 책을 가장 많이 읽었다. 나는 앞으로도 친일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