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일인詩위 - 김경주, 제이크 레빈 외

마루안 2018. 12. 3. 22:30

 

 

 

제목도 내용도 아주 독특한 책이다. 서점 진열대에서 <일인詩위>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을 때부터 뭔가에 확 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포에트리 슬램>이라는 낯선 문화 형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一人詩爲라니. 이 책은 시를 좋아하는 내게 새로운 방식의 시운동을 알려준 일인시위였다.

이 책은 네 명의 공동 작품인데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김경주 시인이다. 철학을 전공한 시인답게 아주 철학적인 시를 쓰는 그는 연극, 미술, 등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가진 시인이다. 진즉부터 포에트리 슬램에 관심이 있었고 이런 책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시낭송도 아니고 시극도 아닌 빠른 템포의 가락에 얹힌 시가 랩이라는 장르에 섞였다고 할까. 우리에게는 없는 문화 형식이라 딱히 뭐라 정의를 내리지 못하겠다. 어차피 나는 이 책을 활자로 된 것만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포에트리 슬램을 동영상으로 봤으나 신선하다는 느낌 외에는 큰 감명은 받지 못했다.

나는 일단 시집이라 여기고 읽었다. 랩에 얹은 가사로 들을 때는 못 느꼈는데 시라 생각하고 읽으니 시적 긴장감과 짙은 서정성이 느껴졌다. 포에트리 슬램은 사회 이슈를 끄집어 내거나 부조리를 꼬집는 표어로 동원되어 공연된다.

이 책에서도 용광로, 미세먼지, 소수자, 취업난, 디지털증후군, 월세, 계란파동, 롱패딩 열풍, 비선실세, 젠트리피케이션, 고독사 등 11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제목만 들어도 확 눈에 들어 온다. 일상을 흔들었던 이슈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다.



1. 용광로

2010년 9월 7일 충남 논산의 한 철강업체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20대 청년이 용광로에 빠져 사망했다. 이 사고로 청년의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사건이 일어난 후 전국에서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용광로에 빠진 눈사람 - 김경주

1
내가 용광로에 빠진 날
내 몸은 사라졌어.
뜨거운 쇳물에 모두 녹아버렸지.
뼈 한 조각 남지 않았지 물론
내 이름도 남지 않았지 물론
너는 내 이름도 기억 못하겠지만
가슴이 아파, 어머니에게 머리카락 한 가닥 손가락 한 마디
남기지 못했으니까.
내 잘못은 이 세상에 나와 발을 헛딛었을 뿐
용광로에 빠진 눈사람이 되어버렸지.

2
나는 너무 뜨거워서 이제 눈사람이 되었어.
내 몸은 다 녹아내려서
당신이 밥 먹는 숟가락이 되었을까.
내가 일하던 공장은 철강공장
나는 당신 집의 젓가락들이 되었을까.
내가 일하던 공장은 하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철강공장.
내 잘못은 이 세상에 나와 발을 헛딛었을 뿐
내 심장의 용광로는 식어버렸어.
(이하 생략)


앞이나 뒤나 - 제이크 레빈

 

(앞부분은 생락)
내 삶의 헐떡임
잊기 위해 나는 연소한다.
공기 없이도
나를 연소시킨 사람들을 잊기 위해
나는 연소한다.

이렇게 한 주제를 놓고 김경주 시인과 미국 시인 제이크 레빈의 시가 연달아 실린다. 두 시 모두 바로 뒷장에 영문으로 번역된 시도 실었다. 제이크 레빈은 한국에서 공부하고 교수로 재직중인 번역가이자 시인으로 미국의 출판사 편집장이다. 김경주의 시집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6. 월세

2014년 서울 송파구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세모녀 동반자살 사건으로 떠들썩 했던 적이 있다. 이 책에서도 월세라는 장에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김경주의 짧은 시가 네 줄로 실렸다.

월세 - 김경주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 할 것 같아
미리 월세와 전기세 수도세 두고 갑니다.
이 방을 좀더 써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천국엔 월세가 얼마일까요?


8. 롱패딩 열풍

올해 초 평창 동계올림픽을 전후해서 롱패딩 열풍이 분 적이 있다. 가성비 좋은 롱패딩을 사기 위해 백화점 앞에서 수백 명이 밤샘 대기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회적 이슈를 롱패딩 열풍이라는 장에서 다루고 있다. 다소 긴 시라서 군데군데 생략하면서 인상 깊은 구절만 옮긴다. 눈으로 읽더라도 랩송 가락을 떠올리며 리듬에 맞춰 읽어보면 감동이 더욱 생생하다.

날아라 거위 - 김경주

우리 엄마가 하루에 만드는 붕어빵은 오백 개야.
그중에 내가 먹는 붕어빵은 다섯 개야.
엄마는 떨이로 팔다 남은 식은 붕어빵을 가져와서
자는 나를 깨워 내 입에 넣어주곤 했어.
거위가 새끼들에게 붕어를 물어다 나르듯이
겨울이면 우리 엄마는 이걸 행복이라 생각하지.
(생략)
엄마 나는 붕어빵보다 거위털이 가득한 롱패딩을 갖고 싶어.
붕어빵 속에 거위털이 가득한 꿈을 꾸다가 깨어나 울었어.
붕어빵을 파는 엄마와 내 겨울 점퍼엔 솜만 가득 들었어.
겨드랑이에서 솜이 삐져나올까봐
나는 지하철에 앉아 날개를 펴지 못해요.

내년에는 붕어빵을 열심히 팔아 꼭 거위털 롱패딩을 사주마.
엄마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예쁘게 붕어 눈을 만들고
붕어 지느러미를 만들고 붕어 아가미를 만들어.

어느 날 발목까지 평창 롱패딩을 입은 아디들이 줄을 서서 엄마에게
오백 원짜리 동전을 던지며 붕어빵을 달라고 하는 걸 보았어.
아줌마 붕어 두 마리 주세요.
엄마는 붕어 아가미를 집게로 건져 올리며 말했어.
학상 그 잠바 거위털 맞아? 그거 얼매야?
이거 라이브 플러킹live plucking 한 거에요.
살아 있을 때 잡아 뜯어야 털이 살아 있데요.
여기에 거위 열다섯 마리에서 스무 마리는 들어가야 한대요.
엄마는 롱패딩 때문에 등골에 브레이크가 걸렸어.
(이하 생략)

내가 편한 만큼 누군가는 고통을 받는다는 법칙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이만 끝내고 싶은데 고독사라는 마지막 장에 실린 시가 자꾸 눈에 어른거린다. 초겨울에 들이 닥친 한파처럼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대목이다.

 


11. 고독사최근 한국 노인들 절반 이상이 고독사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왔으며, 일부 저소득층이나 극빈 노인들의 경우 유족의 경제적 빈곤으로 시신 인수를 거부당하거나 장례 절차도 없이 시신이 화장되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사회적으로 존엄한 죽음에 대한 논의들이 제기되고 있다.

 

DNR - 김경주

 

내 가슴엔 문신이 하나 있어.
DNR(do not  resuscitate)이라는 글씨야.
의학용어로 심폐소생술을 거부한다는 뜻이야.
내 심장이 멈추면 더 이상 날 살려주지 말아줘.
멀리 있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이제 그만 해줘.

나는 매일 밤 잠들기 전 화장을 하고 자곤 해.
마지막 화장일지 모르기 때문에 곱게 하고 싶어.
벽에 돌아누워 화장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눈물을 흘려.

어느덧 내 머리칼은 흰 폭설로 하얗게 변했어.
이불 속에 누워서 삶이 가여워서 나는 웃곤 해.
다시 아침이 온다면 살아서 웃음이 날 것 같아.
열심히 삶을 속여도 늙는 건 못 막아.
(이하 생략)

<다시 아침이 온다면 살아서 웃음이 날 것 같아>라는 이 강렬한 가사를 어떻게 다스리고 소화시켜 마음 속에 담을 수 있을까. 랩으로 불려도 좋겠지만 한 편의 서정시로도 손색이 없다. 더 이상 이 책에 대한 소감을 무엇으로 보탤 것인가.

다양한 장르를 담고 있는 이 책은 그 만큼이나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10대들은 포에트리 슬램 공연에 환호를 보낼 것이고 어떤 사람은 2차 대전 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유태인처럼 보이는 사진에 관심을 보일 것이고 나처럼 활자가 더 친숙한 사람은 가사에 관심을 보일 것이다. 어쨌든 닥치고 사서 읽어 보란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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