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通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서 발견한 신작시 두 편

마루안 2018. 10. 2. 21:47








# 서점에 갔다가 창작과비평 가을호를 발견하고 단번에 저질렀다. <분단 너머의 한반도>라는 특집 기사가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문예지에까지 이런 특집이 실리는 것은  올 봄부터 불어닥친 남북 평화 무드 때문이다.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기에 꾸준히 인내하면서 한 걸음씩 나가야 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처럼 평화도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문예지에서든 시편을 유심히 본다. 이번 호에는 어떤 시가 실렸을까 기대감과 함께 신작시를 읽는다. 거기서 유독 눈에 띄는 시를 발견했다. 이종형 시인의 시편이다. 두 편 모두 가슴을 설레게 하는 울림이 있다. 해당 페이지를 찍어 사진으로 올리려다 한 자씩 옮겨 적기로 했다. 처음 읽을 때의 감동이 자판을 두드리며 한 줄씩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좋은 시는 늘 이렇다.


이곳에 올리는 시는 거의 전부가 시집에서 읽고 옮긴 것이다. 웬만해선 문예지에 발표한 시는 올리지 않는다. 문예지에서 읽었던 시가 나중 시집에서는 심하게 성형 수술을 하고 실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거나 가지치기를 하고 싶은 시인의 퇴고를 이해하면서도 먼저 발표한 시를 의붓자식 취급하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있다. 좋은 시를 발견한 기쁨에다 시집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한 번 읽고 잊혀진 시가 많기에 가장 안전한 공간이 이곳이다.





어떤 헤어짐과 마주할 때 - 이종형



수전증이 왔어
어제는 삼십년 단골손님 구레나룻에
오늘은 동생 귓바퀴에 피가 비치게 했네
가위도 면도기도 더이상 내 수족이 아닌 것 같아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이 업을 시작했어
가위 하나로 여섯 식구 먹이고 키우고 공부시키며 오십몇년 훌쩍 지났고
더이상 돈 욕심은 아니고 할 줄 아는 일이 이뿐이라
내후년 이흔 그때까지만 할 수 있으면 감사하다 싶었는데
눈보다 덜컥, 손이 먼저 낡아버렸어


부러 날 찾아오는 단골만도 수백명
그이들에게 뭐라 하지
나 이제 그만둔다고 인사를 드려야 하겠는데
어떻게 얘기하면 좋지
곰곰 생각해봤는데 번호 있는 이들에겐 문자라도 보내고 싶어
이번주가 마지막이다 싶은데
아우는 글 쓰는 사람이니 소박하게 인사말 두어줄 써주면 안 될까


구구절절하게 말고 담담하게, 그리고 떳떳하게
손이 떨려서 더이상 가위 못 잡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이렇게만 쓰세요 미안해할 일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게 어디 담담한 일인가 싶어
한 세월 떠나보내는 일이 몇줄 인사로 감당이 되는가 싶어
이십년 내 머리를 매만졌던 사내의
처음이자 마지막 청탁을 완곡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날


주인 잃은 줄도 모른 채 태연하게 누워 있는
이발가위, 면도기 몇개
떨리는 손을 꼭 잡아주지도 못하고 허둥대며 돌아오던 날






칠머리길 팽나무 - 이종형



여긴 보통 올레길이 아니라 섬에서 제일 큰 당굿터였어
굿터 옮겨진 이후 그때 그 사람들 다 떠나가고
동네 심방처럼 나만 남았는데
수십년 굿판 지켜보며 이런저런 본풀이 듣다보니
내게도 재주 한가지가 생기더군
선무당도 가끔 사람을 살려내듯
위로의 기술을 익혔지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되는 거야
어떤 넋두리일지라도 들어주는 것만으로 이미 답답함이 반은 풀리고
그 순간 내일의 운세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지


붉은 노을은 밤이 길어질 징후
어젯밤엔 젊은 사내가 찾아와 한참을 머물다 갔어
먼 수평선 집어등 불빛 하나둘 사그라질 때까지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사내
실연일까 실직일까 또는 다른 무엇일까
사내의 침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사는 거 별거 아니라고 달래주지도 못했어
나는 아직 선무당이 맞아
떠나간 큰 심방처럼 영험해지려면
이파리 모두를 귀로 변신시키고
소리 없는 슬픔도 읽어내는 기술을 익혀야겠어
차라리 그늘에 든 이의 속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투시기가 되면 좋겠어


신지항에서 백팔계단 오르면 닿는
제주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아흔살 먹은 팽나무, 선무당처럼
나 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