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 심재휘 시집

마루안 2018. 9. 29. 22:38

 

 

 

이번 연휴 며칠 간의 여행길에 줄곧 배낭 속에 들어 있던 시집이다. 얼마전에 구입한 몇 권의 시집 중 단연 빼어난 시집이어서 망설임 없이 배낭에 넣었다. 버스에서, 숙소에서,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터미널 대합실에서 반복해서 읽었다. 몇 편의 시는 서너 번씩 읽었을 것이다.

요즘에 나온 시집 중에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여러 번 읽고 싶은 시집이 몇 권이나 될까. 갈수록 좋은 시집을 만나기 힘든 시대다. 독자와의 소통보다 당선되기 위해서나 아니면 상을 타려는 목적인지 평론가들 눈에 들기 위해 쓰다 보니 도무지 뭔 소린지를 모르겠는 시가 지천이다.

심재휘의 시는 일단 이해하기 쉽다. 탈고를 거듭해 긴 시간 다듬어진 싯구들이 잘 숙성되어 독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최신 유행의 언어보다 지난 세월을 잘 견뎌낸 단어들이 조화롭게 연결되어 여름 봉숭아 씨앗 터지듯 확 가슴에 안겨온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듯 아무리 많은 시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어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소용 없는 것, 심재휘의 시는 시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에게도 쉽에 다가온다. 문학적 완성도는 이런 곳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어느 인생인들 곡절 없는 사람이 있겠느냐만 심재휘의 시에는 그냥 살지 않은 사람들의 아픔이 담겨 있다. 뜬구름 잡는 모호함이나 구색 맞추기 위한 인생들의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말랑말랑한 시들과는 다르다. 품격 있는 시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까.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시에 빼어난 서정성이 더해져서 반복해서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또 시집에 실린 시들이 고른 완성도를 갖고 있는 것도 본전 생각이 나지 않게 한다. 한두 편 빼고 나머지는 덤으로 실린 시들로 채워진 시집과는 다른 점이다.

올 가을 시집 한 권 소개하라면 망설이지 않고 이 시집을 추천한다. 울퉁불퉁한 반항심으로 가득했던 청년이 조금씩 쇠락해가는 중년임을 깨닫고 쓸데 없는 힘을 빼고 인생을 조용히 관조한다. 가을빛이 완연한 시기에 단정한 시인의 쓸쓸함이 독자의 인생을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