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기의 발달사 - 김명기

마루안 2018. 8. 17. 22:53



이기의 발달사 - 김명기



사는 일은 얼마나 호전적인가
같은 일을 되풀이해도 감각은 점점 퇴화하고
침묵보다 혓바닥만 발달하는
비루한 진화의 잔혹사


스타팅 버튼을 눌러야
비로소 호흡을 하는 이 큰 덩치는
단지 밥벌이를 위해 구르는 잔혹의 발달사
모든 일 앞에 마지못해 란 말을 숨겨놓은 생들은
갸륵하거나 무참하다


지나온 시간은 모두 나의 것이지만
예측 불가능한 미래는 나의 것이 아니리라
빠르게 점멸하며 위험을 경고하는 붉은 경광등
등의 불순함은 감정 없이 깜빡이며 예측하는 일
마치 내 것 아닌 미래처럼
내 것이 아닌 것이 나를 채촉하는 시간
이 비관적 낙담에 의존하는
위험하고도 호전적이며 불순한 아침



*시집, 종점식당, 애지








이기적 유전자* - 김명기



그의 아버지는 사끼야마**였다
그의 큰형도 사끼야마였다
그해 봄 아버지 낙반사고로 돌더미에 깔려 죽었다
그 가을 갱내 폭발로 큰형도 죽었다
그는 봄엔 울었으나 가을엔 울지 않았다
우린 열아홉 살이었고 죽지 않기 위해
날마다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대입학력고사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
담배를 물고 교련복을 입은 채
운동장을 걸어 나가던 그의 뒷모습을
삼층 복도 끝 창가에서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불러 세우지 않았다


태백역 근처에서
이십 년 만에 종태를 만났다
홍시빛깔 포장마차에 감씨처럼 틀어박혀
잘 먹지 못하는 소주와 산낙지를 시켜 놓고
긴 세월만큼이나 물러터진 물오이만 씹었다
객지를 떠돌다 돌아온 지 여섯 해
늦장가 들어 애들이 아직 어리다며
이제는 어둠이 익숙하다고
예전처럼 큰 사고는 나지 않아 다행이라며
묻지 않은 말에 혼자 중얼거리다
이런 것도 틀림없이 유전이라고
고개 돌리며 웃었다


그 늦가을처럼
눈물 대신 담배를 피우며
허공을 향해 둥근 연기를 쏘아 올리던 그가
유치원 다니는 큰애는
지 애비 직업이 사끼야마라고
어릴 적 우리처럼 말한다고 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에서 차용, 모든 유전자는 개체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자손을 남기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
**광산 막장에서 채탄 작업을 하는 선산부






# 탄광촌에서 성장한 시인은 어릴 때부터 시인이었지 싶다. 삶의 원초적 본능이 꿈들거리는 삭막한 주변 풍경에서 시적 소재를 품고 성장했으니 시인이 안 되고 배기겠는가. 막장처럼 어두운 곳에서 시를 건져 올리는 재능 또한 타고난 것이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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