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결별의 이유 - 강회진

마루안 2018. 8. 16. 22:37



결별의 이유 - 강회진



먼 인도에서는 암소를 팔기 전
주인은 그 암소와 사흘 낮,
사흘 밤을 함께 지낸다
암소에게
결별의 이유를 설명해주기 위해서다


촛불은 다섯 개 꺼져 있는 하나
꺼진 촛불은 다시 불붙지 않는다
간신히 나를 밀어 여기까지 왔다
그것이 나를 끄는 일인지도 모르고


사흘 밤, 사흘 낮 동안
이유도 없이 나를 찌르고 간 풍경들을 수집한다
걸어온 만큼 풍경들이 지워진다
다르다는 것은 매혹이면서도 결국은 갈등
더 이상 결별의 이유가 필요 없을 때
용서한다는 것은 잊는다는 것이라 하자


기차를 환승하듯
인생도 훌쩍, 환승할 수 있을까



*시집, <반하다, 홀딱>, 출판사 장롱








안착한 사람들 - 강회진



연리지는 살기 위한 몸부림 혹은 습관. 사는 게 삼류 같아 가면을 쓰고 있는 내 안의 나, 침대가 너무 짧아 다리라도 잘라야 할까 사랑하냐고 묻는 내 말에 당신이 침묵으로 답하는 사이 관계의 주름살은 또 늘어간다 난 끔찍해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감춰야 한다는 것이
어느 날 나는 꽃을 받았어요 꽃은 사랑하는 사람만이 보낼 수 있는 증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것이 분명해요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반드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모두 안착하고 싶어 하지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는 이유는 그것, 도무지 안착한 사람들로 가득 찬 여기만 아니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 흥분한 말은 본능적으로 혈관을 물어뜯어 자유롭게 호흡 한다지 화악, 부풀어 오른 혈관의 물꼬를 트고 싶어


안 착한 당신,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제발, 알아보지 못하기로 해





자서


하얼빈이 고향인 지인에게서 얼후(二胡)를 받았다
아버지의 얼후라 하였다
얼후를 곁에 두고 자는 밤이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먼 북방의 차겁고도 환한 풍경들이 펼쳐져
깨고 나면 눈이 시렸다
낯선 곳에서의 한 철, 소리를 잡고자 한다
하여 보름달 뜬 낮과 밤
좋은 당신 몰래 불러내어
絃의 울음을 나눌 것이다
당신도 기다리는가 그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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