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기보다 멀리 - 김시종

마루안 2018. 8. 15. 19:06



여기보다 멀리 - 김시종



내가 눌러 앉은 곳은

머언 이국도 가까운 본국도 아닌

목소리는 잦아들고 소망이 그 언저리 흩어져 버린 곳

애써 기어올라도 시야는 펼쳐지지 않고

깊이 파고들어도 도저히 지상으로는 내려설 수 없는 곳

그럼에도 그럭저럭 그날이 살아지고

살아지면 그게 생활이려니

해(年)를 한데 엮어 일년이 찾아오는 곳


거기선 모든 게 너울거리고 떠들썩한데

소란 끊긴 여기는 바람 한 점 없다

그런데도 한결 흔들리고 있는 건 바로 나

바람은 어쩌면 깊은 사념 속에 살랑댔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 끝없는 희구의 요람인 것을

내가 흔들리고 내가 흔들고 성장하는 나를 내가 기다린다

그렇듯 시절은 내게서 멀어

유독 내게 멀찍이 동떨어져 머언 현재도 아니다


애당초 눌러 앉은 곳이 틈새였다

깎아지른 벼랑과 나락을 가르는 금

똑같은 지층이 똑같이 움푹 패어 마주 치켜 서서

단층을 드러내고도 땅금이 깊어진다

그걸 국경이라고도 장벽이라고도 하고

보이지 않는 탓에 평온한 벽이라고도 한다

거기엔 우선 잘 아는 말(언어)이 통하지 않아

촉각 그 심상찮은 낌새만이 눈과 귀가 된다


내가 눌러 앉아 버린 자리는

백년이 고스란히 생각을 멈춘 곳

백년을 살아도 생각에 잠기는 날은 아직

어제 그대로 저물어 가는 곳

고국에 머얼리 타향에 머얼리

그렇다고 그토록 동떨어지지도 않은

늘상 되돌아오는 지금 있는 곳

여기보다 멀리 ( )보다 바로 여기에 가까이



*시집, 경계의 시, 도서출판 소화








돌아가리 - 김시종



그럼 다녀오기로 하자

메울 수 없는 거리의 간격을

손으로 더듬어 눈여겨보기로 하자


먼 데 바라볼수록

석양은 언제나 산자락에 걸리고

저 너머 구름 끄트머리에도

함초롱이 저무는 바다가 있어

한달음에 내달아 무엇이건

나는 타 넘어 건넌다


풍토조차 세월에 나부끼는가

늘상 울어대는 저 솔바람마저

서낭당에서는 이미 속삭이지 않는다

내게서 도망친 세월은 여전히 원경(遠景)으로 매달렸는데

못내 망향을 들썩이는 나를 닮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바라보는 위치에서 사그라졌다


그래도 나가 봐야지

누렇게 뒤엉킨 기억이

어쩌면 아직 그대로 그 자리에 바래고 있는지도


숲은 목쉰 바람의 바다였다

숨죽인 호흡을 짓눌러

기관총이 베어 낸 광장의 저 아우성까지 흩뿌리며

시대는 흔적도 없이 엄청난 상실을 실어 갔다

세월이 세월에 방치되듯

시대 또한 시대를 돌아보지 않는다


아득한 시공을 두고 떠난 향토여

남은 무엇이 내게 있고 돌아갈 수 있는 무엇이 거기 있나

산사나무는 여전히 우물가에서 열매를 맺고

뻥 하니 뚫린 문짝은 어느 누가 어찌 손질해

그 어느 봉분 속에서 부모님은 흙 묻은 뼈를 앓고 계시는가

서툰 음화 흰 그림자여


아무튼 돌아가 보기로 하자

오래 인적 끊긴 우리 집에도

울타리 국화꽃이야 씨앗 영글어 흐드러지겠지


영영 빈집으로 남은 빗장을 벗겨

요지부동의 창문을 부드러이 밀어젖히면

갇힌 밤의 사위도 무너져

내게 계절은 바람을 물들여 닿으리라

모든 게 텅 빈 세월의 우리(檻)

내려 쌓이는 것이 켜켜이 쌓인 이유임을 알 수도 있으리라


송두리째 거부되고 찢겨 나간

백일몽의 끝 그 처음부터

그럴듯한 과거 따위 있을 리 없어

길들여 익숙해진 재일(在日)에 머무는 자족으로부터

이방인인 내가 나를 벗어나

도달하는 나라의 대립 틈새를 거슬러 갔다 오기로 하자


그렇다, 이젠 돌아가리

노을빛 그윽이 저무는 나이

두고 온 기억의 품으로 늙은 아내와 돌아가리



*번역: 유숙자

*시집 <화석의 여름>에 있는 시를 시선집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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