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백년 뒤로 보내는 편지 - 신정민

마루안 2018. 8. 9. 23:09



백년 뒤로 보내는 편지 - 신정민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던 시절이었다

사랑을 사고팔던 시절이었다

주기적으로 복고풍이 순환되었고

모든 사건의 배후에 숨어 있는 사랑이

덫으로 애용되던 시절이었다

인생은 짧다는 말이 가장 큰 함정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래, 당신은 무엇을 빼앗겼습니까?'

'무엇을 빼앗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무 것도 빼앗기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일부일처제가 유행하던 시절

사랑해야 할 것이 정해진 율법의 시절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사랑이 가장 위험한 시절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랑 좀 하겠다는데'


들통 날 순간에 댈

여러 가지 거짓말을 준비하며 살았던

하, 수상한 시절에 몰래 이루어진 일들이 있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전쟁이었던 시절이었다


'아빠, 사랑이 뭐에요?'

'음,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지만

자주 일어나는 일이란다.'



*시집, 꽃들이 딸꾹, 애지출판








안녕, 블라디보스톡 - 신정민



혼자서 밤길을 걷는다는 것은

시든 베고니아 꽃보다 슬픈 것


보드카로 달래보는 추위는 사랑을 견딜 수 없게 하고

팔짱을 끼고 걷는 어둠은 떠나 버린 연인을 더욱 그립게 한다


사랑보다 이기적인 것은 없더라

연인을 좀 더 생각하다 가겠으니 시간 먼저 가라던 노래


낯선 곳에 묻어두고 오겠다던 이름아

맹세는 늘 어긋나더라


가슴 안 가슴을 가진 러시아 인형들아

영혼은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말 사실이더냐


카페 앞을 서성대던 처녀들이 콜택시를 타고 사라질 때

지상에 닿지 못한 별빛 아래 무표정한 누이보다 쓸쓸해서

시린 손끝에 입김을 불어본다


타향아 , 나 잠시 다녀간다

성냥불 같은 이 순간들이 꺼지면

바다 끝에 누가 서 있는지 나, 더 이상 묻지 않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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