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뒤로 보내는 편지 - 신정민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던 시절이었다
사랑을 사고팔던 시절이었다
주기적으로 복고풍이 순환되었고
모든 사건의 배후에 숨어 있는 사랑이
덫으로 애용되던 시절이었다
인생은 짧다는 말이 가장 큰 함정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래, 당신은 무엇을 빼앗겼습니까?'
'무엇을 빼앗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무 것도 빼앗기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일부일처제가 유행하던 시절
사랑해야 할 것이 정해진 율법의 시절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사랑이 가장 위험한 시절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랑 좀 하겠다는데'
들통 날 순간에 댈
여러 가지 거짓말을 준비하며 살았던
하, 수상한 시절에 몰래 이루어진 일들이 있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전쟁이었던 시절이었다
'아빠, 사랑이 뭐에요?'
'음,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지만
자주 일어나는 일이란다.'
*시집, 꽃들이 딸꾹, 애지출판
안녕, 블라디보스톡 - 신정민
혼자서 밤길을 걷는다는 것은
시든 베고니아 꽃보다 슬픈 것
보드카로 달래보는 추위는 사랑을 견딜 수 없게 하고
팔짱을 끼고 걷는 어둠은 떠나 버린 연인을 더욱 그립게 한다
사랑보다 이기적인 것은 없더라
연인을 좀 더 생각하다 가겠으니 시간 먼저 가라던 노래
낯선 곳에 묻어두고 오겠다던 이름아
맹세는 늘 어긋나더라
가슴 안 가슴을 가진 러시아 인형들아
영혼은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말 사실이더냐
카페 앞을 서성대던 처녀들이 콜택시를 타고 사라질 때
지상에 닿지 못한 별빛 아래 무표정한 누이보다 쓸쓸해서
시린 손끝에 입김을 불어본다
타향아 , 나 잠시 다녀간다
성냥불 같은 이 순간들이 꺼지면
바다 끝에 누가 서 있는지 나, 더 이상 묻지 않으마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복 - 유병근 (0) | 2018.08.16 |
---|---|
여기보다 멀리 - 김시종 (0) | 2018.08.15 |
어금니와 크레파스 - 백무산 (0) | 2018.08.09 |
사랑의 뒤쪽 - 황학주 (0) | 2018.08.09 |
희랍(希臘) 비극을 읽고 싶은 소년 - 전대호 (0) | 2018.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