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금니와 크레파스 - 백무산

마루안 2018. 8. 9. 22:54



어금니와 크레파스 - 백무산



어금니를 세개나 뽑고 치과를 나서는데 들킨 듯
덜컥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단추 꼭꼭 꿰어주고 명찰 단정하게 달아주고
공책 필통 신발주머니 일일이 챙겨주실 때
한눈팔지 마라 당부는 겉귀로 흘리고
동무들과 저물도록 깜부기처럼 놀다
크레파스를 잃어버리고 온 날처럼 무릎 꿇고
두 손 들고 벌을 서야 할 것만 같습니다


가난한 살림에 어렵게 마련했을 크레파스와 이빨서껀
그 수고 다 헛되다 돌아앉으실까봐 코가 찡해왔습니다
크레파스야 내가 그림을 아무리 잘 그려가도
환쟁이가 될까봐 외려 걱정거리였어도
꼭 깨물고 평생 놓지 말아야 생의 다짐을 허접하게 했습니다


이런저런 기대는 애시당초 접어두었다지만
한몸 건사도 못할까봐 걱정 안기는 일 못할 짓인데
물려받은 머리칼 하나도 함부로 말라는 옛사람 말뜻
이제 조금 안다고 해도 늦었습니다


언젠가 나도 돌아가 그간의 사정을 다 털어놓고
구석진 곳에 벌을 서고 있으면 쌀독에 묻어둔 것 들고
종종걸음으로 크레파스를 사오셨듯이
먼 어둠 끌어와 나를 다시 낳아주시려나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마당이 있는 집 - 백무산



마당이 있는 집에 들어서면서
저녁이 왔네,라고 나는 말했다
다른 때 같으면
다른 곳 같으면
해가 저물었구나,라고 말했을 것이다


저녁은 쓰러지는 한때가 아니라
서서히 물들어 저녁이 태어나고
저녁이 어둠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낙화는 거두어들임의 한때가 아니라
낙화라는 특이의 피어남이 있는 것을 보았다
많은 것을 내려놓아 환해지는 한때를 놓아둘 곳이
마당 같은 곳일까


문밖이 곧장 길이래서야
마음 밖이 곧장 타인이래서야
가난이 절벽이 되어서야
어스름이 담길 곳이 없네
마음 밖에 가난한 마당 하나 있어야겠다
그곳에서 어스름이 완성되면 어둠으로만 가야 하는 건 아니지
봄꽃들 지고 여름을 맞이하듯이
한낮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어스름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 백무산 시인은 총 아홉 권의 시집을 냈는데 그 중 가장 빼어난 시집이 <그 모든 가장자리>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위 두 시를 시집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순전히 내 맘 대로다. 시를 읽을 때마다 딱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 <가난한 살림에 어렵게 마련했을 크레파스와 이빨서껀>, 이 구절의 마지막 어휘인 <이빨서껀>이 무슨 뜻인지가 여전히 의문이다. 오타인지 시인의 고향인 영천 사투리인지 아직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