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팔월생 몽고반점 - 이은심

마루안 2018. 8. 9. 22:05

 

 

팔월생 몽고반점 - 이은심

 

 

커다란 리본이 케익의 입구를 막고 있다

비둘기는 나보다 개를 더 무서워한다

소나기처럼 몰아서 먹고

구름처럼 몰아서 자는 것은 몽고반점의 후유증이다

 

총알이 날아와도 태어날 사람은 태어난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반씩 걸쳐 입고 나는 벌써 오래 살았다

세상은 나보다 먼저 와 있어서 무사히 입적(入籍)했지만

내 외로움은 매자나무 붉은색을 줄기차게 따라가고

그해의 사금파리는 옆구리를 찔러

기어이 운명을 풍선처럼 터뜨렸다

 

씨익 웃어주는 형용사들에게 내 방의 소품들을 빌려주고 싶다

 

파티는 없다

당신으로 왔다가 손님으로 사라지는

단 하루 살다 가는 기념일

배달된 꽃의 안색은 해마다 검푸르고

선물상자는 악착스레 선물을 끌어안는다

여러 번 보아도 정이 들지 않는 자축의 얼굴

백발이 무릎으로 떨어질 때까지

별자리의 굴곡은 여전할 것이다

새끼 밴 짐승처럼 지극하게 우는 산후의 창문 속으로

딱 한 사람만 타고 있던 버스는 이미 출발했다

 

땅에 떨어진 것들은 모두 누가 떠밀어 아픈 것인가

이 촛불의 방문을 아무리 해도 말릴 수가 없다

 

 

*시집, 바닥의 권력, 황금알

 

 

 

 

 

 

바람을 매매하다 - 이은심

 

 

사물도 별안간 늙어버릴 때가 있다

 

첫 손님이 들기도 전에 매매계약서 용지가 누렇게 분해된다

 

거래가 깨질 때마다 탁자를 기어 다니는 실금이 변두리를 바퀴째 오르내리며 명함을 돌린다

 

도시에서 도시로 부는 헛바람은 지번이 없고

 

발바닥 물집 잡히도록 황금의 땅을 돌아다녔으나 구두를 털면 모래만 떨어진다

 

모든 아침의 출발은 아름다웠지만

 

한 채 두 채 야근하는 별들의 월세방에서 누군가 오래된 영혼을 임대하며 울 것 같아

 

빈 서랍을 데면데면 지나가는 어제와 무수한 내일들

 

다급하게 직진해오는 가로수가 광막한 오십대를 세워보려 하지만

 

이제는 해가 떠도 맑은 날이 별로 없는 가등기의 생을 해약하고 싶다

 

공터에 나가 덕담이나 하며 민들레나 구름의 생으로 입주하고 싶다

 

 

 

 

# 이은심 시인은 1950년 대전 출생으로 한남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2003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얏나무 아버지>, <바닥의 권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