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먼 길 - 서상만

마루안 2018. 8. 5. 21:22



먼 길 - 서상만



법고 소리 번지는 절골
고목 삭정이에
새 한 마리 가부좌로 앉아
운판, 목어 소리까지 삼키고 있다


새 머리가
노승의 갓 깎은 머리같이 희끄무레하다


북풍 속에 먼 길을 탁발해온
누비옷의 화엄이다


내 아직 저만도 못한 허방살이 같아
히죽히죽 공적(空寂)을 깨물며
돌아서는 길,


잠시 내려다본
절 마당 돌확의 만다라화(曼陀羅華) 한 송이
물 위에 비친 내 얼굴을 감춰주네



*시집, 사춘, 책만드는집








사춘(思春) - 서상만



그늘에 깔아놓은 동백꽃 이불


가끔 먹구름 먹먹히 내다보고
갈바람 걸게 치근대도
꽃 진 이부자리마다
獄門(옥문)을 타 넘는 은밀한 숨소리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수면제를 안 친 문장이다


조금 전 막차에서 뛰어내린
귀때기 새파란 울음도 멎어





# 처음 읽을 때와 두 번 읽을 때 의미가 조금 선명해지더니 세 번째 읽고 나서 무릎을 친다. 이건 그냥 써진 시가 아니다. 시로 사무친 사람의 몸 속에 잠복해 있다 신병 걸린 무당이 작두 타다 외는 呪文처럼 삐져 나온 거다. 시와 소통하는 내 마음도 어찌 보면 아주 정직한 일, 꿈보다 해몽이 아니라 구슬이 서말이래도 꿰야 보배라는 말이다. 서늘하게 다가오는 시인의 말을 옮긴다.


시인의 말


별이 더 가까이 보인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


시간아 미안하다


詩에 빠져
너를 값없이 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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