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자화상 - 이종형

마루안 2018. 8. 5. 21:38



자화상 - 이종형
-동짓달 스무사흗날 밤에 관하여



달빛도 없었다는데


만삭의 내 어머니
철모르는 뱃속 발길질에
눈물짓기 딱 좋은 어둠이었다는데


성 밖 오름 정수리를 달구던 봉홧불 사그라지고
대숲에 성긴 바람도
숨죽이던 겨울 근처
섬은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는데
어머니 배만
봉긋 솟아 있었다는데


뜨끈한 구들장 온기 위로
나, 툭 떨어져 탯줄 자르기 전
외할아버지는 곡괭이 들고
어머니의 작은 방
그 방바닥을 다 파헤쳤다는데


육군 대위였다는 육지것 내 아버지
그 씨가 미워서였다는데
배롱꽃처럼 고운
딸을 시집보내 얻은 세 칸 초가집의 평온
그게 부끄러워서였다는데
산에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내들이 많았다는데


저야 알 수 없지요
가을 억새 빈 대궁
깃발로 펄럭이고 대나무 죽창 시퍼렇던 밤
멀리 한라산 기슭,
초가집 활활 불타는 모습이 꼭
대보름 달집 태우는 듯했다는 시절
저야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머니 눈물짓기 딱 좋았던
동짓달 스무사흗날 밤
간난아기는 울지 않았다는데
저야 모르는 일이지요


다만, 동짓달 까맣게 사위던 밤이었다는데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








통점 - 이종형



햇살이 쟁쟁한 팔월 한낮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목시물굴에 들었다가
한 사나흘 족히 앓았습니다


들짐승조차 제 몸을 뒤집어야 할 만큼
좁디좁은 입구
키를 낮추고 몸을 비틀며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탓에 생긴
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해 겨울
좁은 굴속의 한기(寒氣)보다 더 차가운 공포에
시퍼렇게 질리다 끝내 윤기 잃고 시들어 간
이 빠진 사기그릇 몇 점
녹슨 솥뚜껑과
시절 모르는 아이의 발에서 벗겨진 하얀 고무신


그 앞에서라면
당신도 아마
오랫동안
숨이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처럼
사나흘 족히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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