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대의 바다 - 권혁소

마루안 2018. 8. 4. 21:37



그대의 바다 - 권혁소



나 그대의 바다에 선다

그대 잔잔한 어깨 너머로

쉼 없이 파도가 밀여와서는

끝내 하얀 포말로 가라앉으며

그대의 귓불을 핥고 발을 적시고

서로 다른 우리들 유년의 기억을 데리고

다시 난바다로 간다

아, 저 벅찬 몸부림


나 그대의 바다에 왔다

물을 향해 끊임없이 자기 몸을 부딪는,

마치 우리들 노동의 역사를 닮아 있는 저 파도는

그래서 점점이 작아지는 사랑의 시간을

아파하는 것이다 아파서 저리

희고도 희게 부서지는 것이다


경험 없는 혁명 같은 사랑이

어느 날 문득 내게 왔듯

그대의 바다에도

못 이룰 꿈 하나 성글게 자라고 있었다



*시집, 아내의 수사법, 푸른사상사








결혼 기념일에 - 권혁소



나도 아내의 것은 아니고

아내도 내 것은 아니다


서로를 닮은 씨앗 하나 뿌리기 위해

잠시 서로를 빌렸을 뿐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손을 잡고 시장에 가기도 하고

잡은 손에 땀이 차면

각방을 쓰기도 하면서

어느덧 이십 년


다른 이에게 우리 서로를 임대하기에는

몰라도 될 것까지 너무 많이 아는 사이가 되었다






# 권혁소 시인은 1962년 강원도 평창 진부 출생으로 1984년 시 전문 무크지 <시인>에 작품을 발표하고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논개가 살아온다면>, <수업시대>, <반성문>, <다리 위에서 개천을 내려다보다>, <과업>, <아내의 수사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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