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림자를 잃은 사나이 - 천세진

마루안 2018. 8. 4. 21:02

 

 

그림자를 잃은 사나이 - 천세진

 
오랫동안 지켰던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잠시 먹먹해졌다 졸업앨범에서 발견되는 이들처럼 떠나는 이도 남는 이도 곧 흐릿해질 것이다
 
전화가 울렸다 몇 번을 더 울리고 소리는 멎었다 사무실에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책상 서랍에서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만년필을 발견했다 만년필의 양식은 오랫동안 쓰이지 않았다 좀체 열리지 않는 뚜껑을 열고 흔들어보지만 잉크는 오래 전 말라버렸다 토해 낼 수 없었던 말들도 껍질을 벗지 못하고 화석이 되었을 것이다 양식이 폐기된 것을 이제 알게 된 것뿐이다
 
만년필을 챙겨 넣고 마지막으로 달력을 집어 들었다 장마다 붉은 펜으로 여러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남겨둔다 해도 누구도 붉은 동그라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달력을 폐지 더미 속에 집어넣었다
 
어둠이 더 짙어졌다 이곳에서의 이력은 끝났다 전등 스위치를 내리자 사직서를 놓아둔 자리에 날아든 불빛이 무대에 쏟아진 스포트라이트처럼 주위를 낯설게 했다 손을 물에 담갔다 꺼낸 자리는 곧 메워질 것이다
 
뒷모습이 슬프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닫고 떠난 아귀 안 맞는 문 사이로 바람이 흘러든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닫고 있는 문은 빈틈이 없으니 슬픔을 남기지는 않을 것이다
 
건물 뒤편으로 들어서자 그림자가 외투자락 사이로 흩어져 내려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차단기가 오르고 차가 빠져나가자 차량통제시스템에 자막이 떴다

'방문객' 82가 8282


*시집, 순간의 젤리, 천년의시작


 

 



저들은 해마다 - 천세진
-시내버스 차창 속의 사내


먼저 퇴직한 이가 보내온 청첩장을 폐지 꾸러미 속으로 구겨 넣고 나온 저녁 시내버스 차창에 떠나간 이름들이 자막처럼 흘러갔다

운 없이 가장 왁자한 시간을 골랐다 교조, 교훈, 잠언, 충고 따위를 껌처럼 씹어대는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생경한 아우성이지만 분명 겪어본 소리들

섰다가 다시 출발할 때마다 왁자한 소리들은 자세를 고쳐 잡는다 한때 저 왁자한 소리였을 때, 손잡이를 잡은 힘만으로도 세상에 흔들리지 않으리라 믿었다

자주 흔들리는 이들과 국밥집에 마주 앉아 술잔을 한숨에 털어 넣을 때 '하나의 이름이 모든 이름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 털어 넣는다 자주 흔들리는 것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섞어 먹는 일에 익숙해진 것

돌아가는 시내버스는 점점 어둠의 비율이 높은 곳으로 향하고 종점이 가까워지자 왁자했던 소리들도 얼마 남지 않는다

노대동* 종점에 내려서자 느티나무 그늘 속에서 벌레 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저들은 해마다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십 년 전이나, 삼십 년 전이나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노대동(老大洞)은 한 도시의 남쪽 끝에 있으며, 여러 버스 종점이다. 노인이 유독 많다. 마을 뒤편의 산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사람이 마소가 없는 마차를 끌고 드나든다. 그 구멍의 형국이 <산해경> 속 관흥국 사람들의 가슴에 뚫린 구멍과 같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대의 바다 - 권혁소  (0) 2018.08.04
노을 - 이태관  (0) 2018.08.04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0) 2018.08.04
한 소년이 지나갔다 - 김점용  (0) 2018.08.03
휘어진 시간 - 이윤훈  (0) 2018.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