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마루안 2018. 8. 4. 20:51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켠에서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시선집, 라디오같이 사랑를 끄고 켤 수 있다면, 책읽는섬








냉장고 - 장정일



열 편도 넘는 광고를 죄다 보고 나니
명화극장 볼 힘이 없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자
뜯어먹고만 싶은 푸짐한 빛이 새나온다.
언젠가 숨바꼭질하던 아이가
냉장고 속에 숨었다 얼어죽었다는데
여기엔 인육 한 점 없구나
미지근한 물을 먹고 문을 닫는다.
치유될 희망 없는 암병동처럼
냉장 능력이 극도로 저하된 이 냉장고
(프레온 가스- 그것들은 날아가서
지구의 한 귀퉁이에 구멍을 내었을 테지)
나는 노트를 찢어 이렇게 쓴다.
"방문객은 여기 손대지 마시오 -잉꼬부부"
누가 우리집 냉장고를 들여다볼까 겁난다.





# 장정일 시인의 30여년 전의 시다. 시인이 직접 오래 된 시들을 추려서 자선시집을 냈다. 젊다기보다 어렸던 나의 철 없던 20대에 그냥 흘려보냈던 시가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과연 시의 유통기한은 얼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