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고막은 젖었거나 슬프다 - 김이하

마루안 2018. 7. 27. 11:01

 

 

내 고막은 젖었거나 슬프다 - 김이하


올 여름, 장마의 긴 그림자 속에서
하여간 끊이지 않는 소릴 들었다
그것은 저주파의, 너무 굵고 커서 귓바퀴에는
들어올 수 없는 그런 소리였는데,
젖은 가죽을 긁는 소리 같기도 하고
강이 물고기를 모는 소리도 같았다
혹은 나무가 뿌리를 들어 이파리를 건드리거나

내장이 기어 나와 목을 조이거나
나는, 그치지 않는 빗속에서 종일 귀를 팠고
귀에선 피가 나도 귀지가 잡히지 않는
이런 상스런 하루하루를 보냈다
면봉으로 아무리 귀를 닦아내도
비위를 건드리는 소리는 건져지지 않았다

나를 비웃었던 당신의 긴 울림이 거기 남아
썩어 문드러져 곰팡이나 키웠을 것인가
하여간, 하여간 나는 어둠 깊어도 잠들 수 없었고
밤새 내 귀에 숨어든 소리의 정체를 찾다
빗방울을 헤며 잠들었다, 고단한 내 나이와 함께
그러나 끊임없이 들려오는 울음소리
흥건히 젖어버린 두 눈을 훔치던 손으로
어느새 나는 귀를 후비고 있다


*시집, <춘정, 火>, 바보새

 

 

 

 

 

 

리모컨 - 김이하

 

 

지루한 일이 많았다

돈을 버는 일, 밥을 먹는 일, 또 사랑하는 일이

그리고 숨을 쉬고 사는 일이

달력 칸을 옮기면서도 못내 심드렁하고

흔해 빠진 연애 소설도 드라마도

발끝에서 꼼지락거리다 이내 사라진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서둘러 리모컨을 찾으러

방안을 휘돈 적이 있었다

그러다 그것도 시들하면 한 호흡 바람 모두어

머리나 씻자고 공원으로 나온다

 

어, 저 봐라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그러져 앉는 잎새들

비둘기들이 땅을 차며 오르는 것보다

저렇게 밑으로 가라앉는 것들이

한없이 그리운 것이다, 지친 나에게

상큼한 그림 한 장 보여주는 리모컨인 것이다

 

아직 찾지 못한 리모컨은 어딘가에 뒹굴며

내가 본 드라마의 이력을 감출 것이다

그러나, 그 이력들은 다 무엇 하나

나는 한없이 저 잎새에 끌려 가라앉고 있는데

그 한 잎이 끝내 모든 걸 지워버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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