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별을 피했다 - 조은

마루안 2018. 7. 25. 22:58



이별을 피했다 - 조은



그를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창백한 그의 얼굴에다
표정 없는 그림자를 내려놓으며
숨결을 확인할 때도
이별을 생각하지 않았다


달관한 듯 조용하던 그는
무엇을 예감했던 것일까
눈을 감고 울었다


어느 날엔 옆 병상에서
막 어머니를 잃은 자식들이
서로를 탓하며 뒤엉켜 싸웠다
그 소란 속에서도 그는 반듯이 누워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맑았다
느닷없이 마른하늘에 돌퐁이 지나갈 때
그는 눈을 번쩍 뜨고
먼지 알맹이들이 황금빛으로 날고 있는
세상을 빤히 바라봤다
아슬아슬한 곳에서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듯한 표정으로


그는
강렬한 두 눈에 담긴 것을
시트 위에 내려놓았다
세상이 잿더미처럼 적막했다



*시집, 옆 발자국, 문학과지성








길을 바꾼 꽃 - 조은



나팔꽃 한 포기가 길을 바꿨다
나팔꽃을 따라 내 길도 바뀌었다
언덕 아래 카페로 가던 길을 버리고
언덕을 올라간다


나팔꽃은 하룻밤 사이에
서너 장의 잎을 틔우기도 했다
비릿한 줄기에다 축축한 핏덩이
꽃도 피웠다


넝쿨이 빠져나온 좁은 구멍에다
눈을 갖다 대면
공사장 용접 불꽃이 눈앞까지 튀었다
나팔꽃이 벽 너머로 옮겨가던 건
뿌리였을까 꽃이었을까
뿌리와 꽃을 잇는 터널이었을까


이 아침 갑자기
그 나팔꽃이 사라졌다
푸른 잎 몇 장만 길 위에 흩어져 있다


능욕당한 것처럼
나는 멍하니 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