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상나무 아래서의 한나절 - 성선경

마루안 2018. 7. 25. 22:20



구상나무 아래서의 한나절 - 성선경



너는 가고 나만 남았다
담배는 한 시간에 한 개비씩만
구상나무 키는 그림자처럼 자주 바뀌지 않았다
너는 가고 나만 남아서
그렁그렁 눈물이 달리도록
봉선화 꽃물을 들이는 오후
기다림도 아니고 그리움도 아닌
늦게 핀 능소화만 붉다
너는 가고 나만 남아서
담배는 한 시간에 한 개비씩만
이런 시간도 밥값이 되려나
한 살 더 먹은 나잇값이 되려나,
생각 중인 구상나무 그늘 아래서
너는 가고 나만 남아서
기다림도 아니고 그리움도 아닌
담배만 한 시간에 한 개비씩
그렁그렁 눈물처럼 달리는 오후
구상나무 아래서는 그림자만 자꾸 자라
기다림도 아니고 그리움도 아닌
봉선화꽃 그렁그렁 달리는 오후.



*시집, 까마중이 머루알처럼 까맣게 익어 갈 때, 파란출판








하늘매발톱은 미나리아재비 - 성선경



내가 방금 생각한 건 잘 잊는다는 것
십 년 전의 일들은 아주 잘 기억이 나
십 년 전의 십 년 전도 아주 잘 기억해
그러나 내가 방금 하려던 말
금방 잊는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한발이 심한 요즘 날씨처럼
그냥 무덥다는 것
무더워도 그냥 견딘다는 것
우리가 아는 하늘색은 하늘색이 아니야
그냥 파래서 종종 잊는 것이지
방금도 한 생각 잊어 먹었어
내가 잘하는 건 잘 잊는다는 것
방금 생각한 건 잘 잊는다는 것
십 년 전의 십 년 전도 기억하지만
그러나 방금 내가 하려던 말
금방 잊는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그냥 파랗게 잊는다는 것.





# 성선경 시인은 후반기에 거의 매년 시집을 묶어내고 있다. 워낙 꾸준하게 시를 쓰는 시인이기는 했어도 요즘의 추세는 시를 생산하는 심장 하나가 더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새 시집에 실린 시에서 이 두 편이 가장 눈에 띄었다. 자주 읽고 싶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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