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해 지는 쪽으로 - 이정록

마루안 2018. 7. 25. 22:38



해 지는 쪽으로 - 이정록



햇살동냥 하지 말라고
밭둑을 따라 한줄만 심었지.
그런데도 해 지는 쪽으로
고갤 수그리는 해바라기가 있다네.


나는 꼭,
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


벗 그림자로
마음의 골짜기를 문지르는 까만 눈동자.
속눈썹이 젖어 있네.


머리통 여물 때면 어김없이
또다시 고개 돌려 발끝 내려다보는 놈이 생겨나지.
그늘 막대가 가리키는 쪽을
나도 매일 바라본다네.


해마다 나는
석양으로 눈길 다진 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


돌아보는 놈이 되자고.
굽어보는 종자고 되자고.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창비








사루비아 - 이정록



신문 위로 소나기 쏟아진다. 사철 입는 겨울 코트가 묵직해진다. 스무마리 남짓한 비둘기와 맨땅 겸상하는 나발 소주가 물먹은 외투를 가로등에 묶어 비튼다. 남의 집 첫술부터 이놈의 먹물이 문제였지. 질질 끌고 가서 에어컨 실외기에 팔자를 펴 말린다. 그림자도 먹물이네, 덩치 큰 송풍기도 어깨 들썩이며 구시렁댄다.


신문도 급수가 있어. 욕 많이 얻어먹는 신문일수록 따듯하지. 면수가 많잖아. 미끈미끈한 광고와 동침하려면 신혼방 꽃무늬 이불처럼 컬러라야 되지 않겠어. 금상첨화 원앙금침이라도 새벽에 술 깨면 추워야. 중앙은 아예 안 써. 갓난애 이불처럼 쪼그마해서 말이여. 안마당에 기차 들어오고 옥상에 백화점 들여놓고 사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니까. 사루비아 꽃술이 그렁그렁 맞장구치려다가, 제 눈물 속 먼 하늘이나 들여다본다.


소나기 쥐어짠 손바닥에 사루비아 피었다.
붓 빤 먹물 양동이 시원하게 엎어버린 서녘 하늘도 오랜만에 손금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