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차가운 손톱 - 주영헌

마루안 2018. 7. 24. 21:55



차가운 손톱 - 주영헌



봉선화 꽃잎 곱게 찧어 손톱 위에 올렸다
손톱을 붉게 물들인 것은 새의 영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바람의 뼈가 이식된 것 같은 날카로운 손톱
내 손의 검지는 새의 발톱을 닮았다
낚아챈 들짐승의 붉은 피가 밴 것처럼
검지엔 꽃물과 함께 달이 떠 있다


저 色은 어느 고원을 넘어온 것일까
고원은 어떤 종(種)을 품고 있으며 어떤 바람의 색을 키우고 있을까
전봇대 위에 매달린 풍선 같은 바람
가끔 환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밝다


꽃잎은 마음 안쪽으로부터 시들고
바람은 새 뼈의 안쪽부터 마른다


바람 한 점 흘리고 날아가는 깃털
저 바람 가득한 구름은 어느 절기를 알리는 부표일까
봄의 말미 뜨겁게 달아올랐을 홍안
지금쯤 고원엔 할 일 없는 바람이 바쁘겠다
초생이 지면 만월이 부화하고
추위가 가득 묻은 어느 손가락엔 봉선화 홀로
바래져 가는 노을을 품고 있겠다



*시집, 아이의 손톱을 깎아줄 때가 되었다, 문학의전당








담백한 삶 - 주영헌



사람이 얼마나 더 담백해질 수 있을까.


몇 달 만에 찾아간 병원
의사가 오줌에서 담백뇨*가 나온다고 한다


담백하다는 말,
매력도 쥐뿔도 없이 태어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서
나 또한,
시 좋다는 말보다 사람 담백하다는 말 더 좋아
그 말 한마디 따스한 온기 얻어 살았는데,


담백하다는 말 한 마디
아와 어가 바뀌지도 않은 같은 말에
가슴이 뚝 떨어질 수 있음을 다시금 느낀다


사십하고도 몇 년을 더 살아온 세상살이
같은 말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그리 자꾸만 잊어버리는 것인지


인생 좀 안다고 그래서 시를 쓰는 것이라고
우쭐거리면서도
 


*정확한 명칭은 단백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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