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땡볕 긴 날의 식구들 - 정원도

마루안 2018. 7. 24. 21:43



땡볕 긴 날의 식구들 - 정원도



먼 들 물심부름 중참을 나를 때는
타는 목 땡볕 긴 들녘이
아이들의 쓸데없는 꿈만치나
아득하고 어질해


제힘으로 밥 떠먹을 만한 식구야
모두가 상머슴이나 식모살이로 흩어져 살고
딸들은 안부조차 알 길 없었다


등뼈 으스러지도록 일 해봐야
명절 두어 번 아이들 옷가지나
조상 제삿밥 안 놓치는 억척으로
빚잔치 안하고 꾸려 사는 것만으로도 용했다


온 가족이 들일 나가고 없는
적막한 빈집에서
홀로 잠에서 깨어 두리번거리다
까맣게 그을린 부엌 아궁이 앞에 퍼질러 앉으면
대낮의 공포가 무턱대고 울어댔다



*시집, 마부, 실천문학사








검정 고무신 한 짝 - 정원도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로
풋사과가 열리고
울타리를 빠져나오는 환한 햇살 사이로
개구멍 찾다가 들켜
정신없이 도망치던 장마철 내리막길


물웅덩이 건너다 철퍼덕!
검정 고무신 한 짝 잃고 돌아온 해거름


어머니 회초리 세례
무른 종아리에 아로새긴 채
굿이 열리던 밤마다 그 징소리 품고
신대 가지 꺾으러 떠돌던 과수원길
절룩이는 달빛 타고 휘돌아온 날은


젖비린내 악머구리처럼 울어대다가
검은 손에 거꾸로 매달린 채
까마득한 정랑 속으로 까무러치던 공포가
자꾸 떠올랐다





# 막막한 슬픔이 이런 것일까. 미증유의 폭염 속에서 시를 읽다 몸 속 어딘가에 잠복해 있던 슬픔이 울컥 솟아 나온다. 시인과 내 경험이 어찌 이렇게 한통속일까. 여섯 살 무렵인가. 낮잠에서 깨어나 아무도 없는 적막한 마루에서 이유 없이 쏟아지던 울음,, 내 울음 소리에 놀라 마당가 감나무 그늘에서 잠을 자던 누렁이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다가와 눈물 묻은 얼굴을 핥았다. 일 나간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 아득하다는 걸 깨닫고 눈이 부시게 마당을 가득 채운 햇살이 더욱 서러웠을 것이다. 한 구절도 버릴 게 없는 밀도 있는 두 편의 시에서 까마득한 유년의 세월이 시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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