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호미에 대한 반역 - 권수진

마루안 2018. 7. 20. 20:03



호미에 대한 반역 - 권수진



어머니가 아랫목에 누워 있어
시인을 꿈꾸는 추방자를 낳은 죄로
일찍 몸이 녹슬고 이가 빠졌지.
척추가 휘어질 대로 휘어져버린 몸이
가끔 애벌레처럼 꼬물거렸지
가끔 어머니가 밭에 사는 벌레인 줄 알았어
종신형 수인번호를 달고 살아야 했던 손발이
타인의 삶을 보듯 추했어
아직 주검이 되기 먼 나이
불쌍한 어머니는 또 묵정밭 걱정하지 
호미를 달라고 어머니 칭얼거리지
호미가 극약이면 좋겠어
내가 편안히 잠들 수 있는 꿈이면 좋겠어
호미가 나를 따라와 날카롭게 쪼아댔어
나는 자식을 낳지 않을 거야
호미 같은 놈이 아버지, 하며 나를 찌를 거야
밭을 갈아야 했어
그건 어머니를 위한 일이었지만
잡초보다 무, 상추, 오이, 시금치, 쑥갓
남새가 지겨웠어
어머니 자리에 꽃을 심고 싶었어
만화방창한 날에 꽃놀이 가고 싶었어
어머니를 치우자 호미가 나왔어
호미자루가 이미 썩어버렸어
그걸 내력이라 부르기에 너무 진부해 
나는 그 호미로 어머니를 갈아엎기 시작했어
나는 나를 가장 많이 닮은 잡초를 위해
김을 매기 시작했어.



*시집, 철학적인 하루, 시산맥사








고삐 - 권수진



이 땅에 나약한 짐승으로 태어나서
종신토록 일만하며 살아왔다
순종을 덕목으로 우기는 세상에서
식솔을 거느리는 가장이었으므로
스스로 코청에다 구멍을 뚫었다
주인이 쇠줄을 잡아당길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안으로 삼켰다
초원을 마음껏 누비는 자유보다
우직한 남편의 길을 걸어갔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자식들
되새김질하며 묵묵히 쟁기를 잡았다
복종을 미덕으로 강요하는 세상에서
고통의 크기만큼 황폐했던 광야는
점차 기름진 땅으로 바뀌어갔다
다만 자상한 아버지이기를 포기했을 뿐
박봉을 쪼개가며 악착같이 살았던
아내의 야윈 손이 거칠어졌을 뿐
무럭무럭 자라나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코뚜레에 족쇄를 채우고 싶지 않았다
가끔씩 구멍 뚫린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아버지도 고삐를 풀고 음머어- 음머어-
목 놓아 울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 권수진 시인은 1977년 경남 마산 출생으로 경남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 1기 출신이다. <철학적인 하루>는 제6회 시산맥 기획시선 공모 당선 시집으로 시인의 첫 시집이다. 아주 짧은 시인의 말을 옮긴다.


*시인의 말

가슴 깊이 품었던
종양을 세상 밖으로 도려냈다.
속이 후련하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땡볕 긴 날의 식구들 - 정원도  (0) 2018.07.24
늙은 피부 - 정덕재  (0) 2018.07.20
돌아가다 - 최서림  (0) 2018.07.20
어제 같은 옛날 - 정일남  (0) 2018.07.19
하늘에 경계를 묻다 - 이형근  (0) 2018.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