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제 같은 옛날 - 정일남

마루안 2018. 7. 19. 23:43



어제 같은 옛날 - 정일남



여름은 우레를 받아먹고 물을 뱉어낸다
물이 한 여자를 끌고 갔다
복수가 불어나서 물의 덩치는 커갔으므로
여자를 보냈다
풀이나 나무숲이 여름 성격을 닮아간다
싸움소리가 나는 곳은 없으나
시간을 재촉하는 매미들이
죽음과 가까워지려고 우짖는다
베옷 같은 날개를 악기 비슷하게 다루며
몇 개의 무덤 위에서 더위를 뱉어낸다
여름은 습기에 젖어 바람이 누렇다
해바라기는 꽃이 아닌 집광경이 되어간다
여자가 내 그림자였던 지난 서른 해는
내가 만지려고 들면 어제 같으나
금방 외면한 채 산모롱이처럼 옛날로 돌아간다
그가 하는 일에 벗바리 되어주질 못했으므로
내가 그의 병을 부추긴 게 괴롭다
지난 날을 지켜보는 저녁은
적막과 노을이 뒤섞여
하루를 회두리판으로 내몬다.



*시집, 기차가 해변으로 간다, 신원문화사








입관기 - 정일남



별은 지붕 위에 던진 그대 단삼 위에 내리고
칠성판에 뚫린 일곱 개 구멍으로
북두칠성 별빛도 그대 잘 비춰 주리니
어서 일어나 가시라
오동나무 가벼운 관이 푸른 날개 달고 날아가려 한다
하지만 잠시 잠깐 기다리시라
이승에서 묻은 먼지 깨끗이 목욕하시고
노잣돈도 모자라지 않게 쥐어드릴 테니
5년 동안 이픈 병소 말끔히 지우고
녹즙 한 컵과 현미죽 한 사발로
다시 기운 차려 평온한 길 가시라
오, 빌어먹을 인간사
이제 그대 하직하고 이승 떠나가면은
저승 볼 일 다 보시고
한 송이 민들레로 돌아오시라
나중에 내가 이승 떠나게 되면
흙이 되어 그대 뿌리 안아 주리니





# 이 시집에는 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아내에 대한 회한으로 가득하다. 노 시인의 순애보라고 할까. 눈길 가는 시가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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