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으로 돌아갈 길을 잃다 - 이태관

마루안 2018. 7. 17. 22:30

 

 

꽃으로 돌아갈 길을 잃다 - 이태관


그녀가 사는 곳은 비비새 우는 화원
수많은 꽃들 무덤으로 피어
이만큼 살아 왔으니 축하해...

목 잘린 꽃의 향기는 지독하다
날마다 새로이 쌓이는 죽음
떨어진 꽃들로 세상은 아름다워
다시 또 한 광주리의 꽃들이 실려 오고

화원은 꽃들의 미로
꽃으로 살아 갈 길을 잃는다
남은 시간을 위해
꽃의 줄기는 불 태워지고
이름 모를 약물에 취해
흙으로 돌아갈 길을 잃는다

화원은 꽃들의 무덤
화려한 만큼
그 무덤 깊어져 가고
기억하는지,
초가을 햇살 아래
무덤 위해 피어난
노란 원추리 꽃 하나


*시집, 저리도 붉은 기억, 천년의시작


 

 



대추나무골 - 이태관
=파라호에서


앞산의 이마가 사립문 울타리를 들추고
밤새 안녕하신가
문안인사 여쭈면
집도 절도 없이
가난에 의지해 살아 온 세월
노부인의 기침 소리와
다리 저는 노인의 발걸음에 의지해
대추나무골의 아침은 시작되지

둘러보아도 대추나무는 보이질 않아
추억은
물 속에 잠들어 있고
빈 허공만을 낚는 늙은 어부,
삐걱이는 나룻배에 온 생을 올려놓고
삶을 저울질하는 그 기다림의 끝에서
물기 머금은 싱싱한
햇살 한 올
건져 올릴 수 있을까

온 몸으로 타는 저녁 강가
땅 위에 발 디디고 살아온 세월만큼
행복한 시절이 있었으랴
제방을 기어오르는 바람에
허리 꺾지 않는
흰 갈대로
대추나무 골의 하루가 저물어가지
물과 물이 하나 되는
그 장엄한 순간,
삐걱이는 나룻배에 온 생을 올려놓고


 

 

# 이태관 시인은 1964년 대전 출생으로 충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1994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저리도 붉은 기억>, <사이에서 서성이다>, <나라는 타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