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 - 이덕규

마루안 2018. 7. 15. 22:53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 - 이덕규



뒷골목 아무렇게나 버려진 빈깡통과 소주병들이 가끔 누군가의 발길에 한 번 더 찌그러지거나
좀더 투명한 제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산산조각이 나는 연습을 했다 어른들은
한 여름에도 허기진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다녔고
담벼락엔 철 지난 흑백 포스터들이 반쯤 찢어져 무슨 쇠락한 이념처럼 펄럭였다 우리들은
그 뜻을 알려하지 않은 채 자본의 전부인 구멍가게에서의 불문의 서열을 세웠고 한낮
골방에 누워 속옷처럼 축축하게 말라가는 여자들에게서 언제든지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조금씩
더 멀리 불야성의 거센 바다로 나아가 빛나는 야광체의 살찐 고기들을 향해 그물을 던졌다
그러나 그 불빛들은 좀체 걸려들지 않았고 좀더 세밀한 그물을 깁기 위해
늘 막배를 타고 멀미하듯 돌아왔다 더러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쫓기듯 돌아와
좁은 골목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흑백 포스터 위로 총천연색 구인광고물들이 수없이 덧붙여졌으나 여전히 그 뜻을 알지 못했고
어느새 빈 호주머니 속 익명의 슬픔에게 상처투성이인 손들이 습관처럼 불려들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내다버린 아직 식지 않은 연탄재 위로 뛰어내린 눈송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어디쯤,
막다른 골목 쪽창 안으로 단검(短劍)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언제든지 모든 것을
철거당할 수 있는 희망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탈출기 - 이덕규



그때 다급한 마음에 뛰어넘은 빈집 높다란 담장 너머 마당귀에서 보았다 가슴에 폭약을 장약한 채 눅눅하게 젖은 천 개의 손가락을 들어 불을 붙이고 섰는 백일홍


나는 왜 폭발하지 않는가


이미 삶의 안전핀 따위는 뽑아버린 지 오래, 자폭을 기다리는 그 늙은 혁명가처럼 당대의 눈물이 다 말라가면서 뜨거워지는 나는 한 알의 시한폭탄이다


그리하여 화약 냄새가 좋은 짐승처럼 눈물 젖은 시간의 도화선을 따라 실패한 청춘의 언덕 너머 지뢰처럼 묻혀 있는 不發(불발)의 씨앗들을 밟으며 나는 왔다


이제 때 없이 뒤통수가 환하다, 돌아보면 마침내 찬란하게 꽃피운 폐허! 내 마음의 국경선 철책에 나부끼는 저 찢어진 옷자락들이여


나는 지금 야간 화물열차를 타고 눈 내린 광야를 지나 먼 먼 북반구의 극점을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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