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하안거의 계절에 - 이재섭

마루안 2018. 7. 16. 19:11



하안거의 계절에 - 이재섭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누구인지 구별되지 않는 환영
허물 벗은 뱀 같이 허연 육신을 가진 사내가 있다
꿈틀거리는 몸뚱이, 비릿한 거품 냄새
허연 살갗 피하에 펴져있는 붉고 푸른 실핏줄들
뜨겁지도 못하고 아직 채 식지도 않은 피가
몸 깊은 곳에서 느릿느릿 흐른다.
동강의 강물처럼 저속으로, 저속으로.


빈사의 몸에 어떤 의문도 제기함이 없이
심장은 처연히 파열되지 못한 채
미세한 불규칙 음을 허기지게 토하고 있다.
아직도 살아있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그건 속된 욕심이다.
그저 어떤 변명도 없이 바닥으로 뛰어내려
단번에 자신의 불의를 단죄할 것이다.
그래도 남은 살점들이 있거든 모두 무욕의 원소로 기화되는
숭고한 번제의식을 준비할 것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
석 달 열흘, 골방에 자리를 틀고
번뇌와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 하안거의 계절이다.



*이재섭 시집, 석탄, 시담포엠








하프 타임 - 이재섭



2대1로 지고 있구나.
전반이 끝난 이 시각에.


지금은 하프타임
나는 락카룸에 있다.


모두들
혼신으로 몸을 푸는데
나는 왜 눈시울이 뜨거워지나.


이제 곧 시작될 후반전에서
나는 누구와 장렬히 싸울 것인가.
나의 새 포지션은 어디여야 하는가.


아직 내가 뛸 경기의 절반이 남겨진 채로
허락된 이 짧은 시간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바람이 분다.
후반전을 기다리는 이 시각에.


이제 락카룸을 나서야겠다.





# 이 시를 읽다 문득 이 문구가 생각났다.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어디서 읽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진지한 시선이 저절로 느껴지는 시다. 평론가를 난감하게 할 거창한 문학적 이론이나 장치 없이도 충분히 감동을 준다. 오랜 기간 문학을 품고 살다 뒤늦게 꽃을 피운 시인의 인생이 부럽다. 그가 뛰고 있는 후반전이 기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