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해변의 길손 - 김유석

마루안 2018. 7. 15. 22:22

 

 

해변의 길손 - 김유석


저 폐허

격포에 가지, 뻔한 말, 뻔한 사랑, 뻔한 세월에
아직도 고동처럼 울어줄 줄 아는 사람 만나
그래, 불륜인 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무너지고 싶어.
격정은 사라지고 막연히 바랄 섬도 없네. 그저
수평선을 어루는 자잔한 물결로
적막한 서로의 몸을 적셔가며 이제
한때라 말해도 될 모든 것들,
제 깊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들의 손을 그만 놓아버리고 싶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지켜온 오랜 망설임보다
썰물 끝에서 견디는 한순간의 미늘 같은 허무가
절정도 없이 걷어내는 삶의 거품들 속에
한참이나 등 맞댄 채 누워 있고 싶어.
뻔한 말을 중얼거린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자해인가, 그리고
뻔한 세월에 속아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무심히 밀고 당기는 물의 단애 앞에서
흘렀고 흘러간 사람, 흘러가버린 일들에 의심받으려
검은 돛배의 기항(寄港) 격포에 갔네.

먼 바다


반지락을 캐는 아낙네들과
다시 그 뻘밭에 살을 묻는 반지락처럼 단순하게 얽히는 바다,
격포에서 곰소 쪽으로
나른한 주말처럼 풀리던 해안선이 퍼뜩 팽팽하게 당겨지는 곳
썰물 끝에 떠오르는 해저(海底)마을이 보인다.
세월만큼 깊이 빠지는 뻘에 묻혀
세월보다 곱게 늙어가는 사람의 마을,
얼핏 이발소 그림 같기도 한 저 곳에 닿는 길을 물어
질겅질겅 산낙지를 씹고
싸한 바다볕을 소주에 타 흘려 넣기도 하지만
뻘밭 매는 아낙네들의 세월과
그들의 구럭에 이물없이 담기는 것들의 살이 섞여내는 갯내에 배지 못한 채
조금 취하고 더러는 깨어
밀물지면 흔적 없는 해저마을,
그 곳을 뜨는 길을 서둘러 긋는 저 바다는
삶의
다른 한 쪽에 얹히는 평행(天秤)저울의 추와 같아

 

 

*시집, 상처에 대하여, 한국문연

 

 

 

 

 

 

상처에 대하여 - 김유석


탱자 한 알이 툭 떨어진다. 아득한 적막에 젖듯
저대로 낙하하는 탱자는 겹겹의 가시 사이를 무사히 통과한다.
그만한 공간을 확보하여 꼭지를 물었거나
허공에 길을 놓을 만큼 가벼워진 생은 아닐텐데
제 몸 하나 다치지 않고 내리는 탱자의 자연함,
열매를 꿈꾸지 않고 떨군 꽃잎의 궤적인가
흔들림만으로는 다 버리지 못하는 미망이
스스로의 몸을 경계삼아
푸른 광기를 잠재운 탱자알들은
가시 끝을 꿴 이슬방울처럼 씨내림 한다.

탱자나무를 감고 먼 길을 가는 호박넝쿨은
몸이 곧 길이다.
따끔거리는 곳마다 꽃을 피우고
쉬어가고 싶은 곳엔 열매를 매달며 장난처럼,
어쩌면 자해하듯 살 속에 가시를 찔러넣는다.
무엇엔가 상처받는다는 건 그것을 사랑하는 일보다 환한 아픔인 줄,
온 몸을 쥐어틀며 견디어나가는 호박넝쿨은
박혀든 가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빠질 때 생길 고통까지를 살로 삭혀서
흠집 하나 없이 매끄란 호박덩이를
완고한 가시 사이에 저렇듯 매달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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