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다시 장마 - 김승강

마루안 2018. 7. 12. 22:11



다시 장마 - 김승강



비만 오면 왜 그리 맥을 못 추니:
맞다. 나는 비만 오면 맥을 못 추겠다.
다시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일까.
비 오는 날에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다시 들어온 것처럼,
어머니의 양수 속인 듯 웅크리고 깊은 잠에 빠진다.
밖에 비가 내리면 나는 태어나기 전 어머니 배 밖에서
들리던 먼저 태어난 사람들의 소리를 잠 속에서 아득히 듣는다.
나는 지금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일까,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의 소리를 밖으로 들으며
태아처럼 웅크리고 내가 깊이 잠들어 있다.



*시집, 기타 치는 노인처럼, 문예중앙








장마 - 김승강



태풍과 함께 장맛비가 쏟아져
나는 아무 데도 갈 수 없고
아무도 내게 오지 않네


젖은 바람 속으로 삶은 감자 냄새를 실어 보내는 자 누군가;
시를 읽다 나는 그이에게 감자가 먹고 싶다고 말하고 말았네


감자가 익으면서 저 바람 속에 실려오는 감자 냄새는 잊었지만
그이가 삶고 있는 감자 냄새는 집 밖으로 나가 또 누구의 코를 간질일까;
빗속에서는 집마다 감자가 동이 나겠네


나는 나도 모르게 삶은 감자보다 뜨거워져서 그이를 안고 말았네
처음부터 감자를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내 몸이 먼저 고백해주었네


우리는 낮은 창가에서
발정한 짐승들처럼 한낮에 그 짓을 했네
골목을 지나가는 발자국은 긴 여운을 남기고
유리창에 듣는 빗방울은 내 목덜미를 차갑게 적셨네
빗소리는 내 귓속 달팽이관을 연신 때리고 나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신음했네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에게도 가지 못한 저녁
눅눅한 장판에 붙은 머리카락처럼 우리는 축축이 젖어 누워 있었네
어둠이 관 뚜껑을 내리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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