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청춘을 거슬러 가는 우리는 - 박순호

마루안 2018. 7. 9. 12:06

 


청춘을 거슬러 가는 우리는 - 박순호


그때는 정말이지
차고 넘치도록 푸른 물방울이 생성되었지
상징을 사랑했었지 우리는
빙그르르..... 돌아가는 지구본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멈춘 자리에 여행을 계획했었지
자신만 알 수 있는 암호를 수첩에 기록하면서

이제, 탱글탱글했던 중심은 쓴물로 채워지고
치욕을 견뎌낸 자리는 쪼그라들었다
푸른 점의 테두리가 닳아간다 그렇게
말수가 부쩍 줄어들고
은유에 몰입할 나이가 된 선배들은
청춘의 폭죽에 관한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밤늦도록 술잔을 채우고 주정하는 거밖에는

우리는 눈이 퍼붓는 창밖에서
청춘을 핑계로 떠나보냈던 여자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후회하며 썼던 일기를 펼쳐보며
다시 후회하고 있는지 모른다
서러운 생각을 밀어내어 웃어보기도 하고
울음으로 바꾸어 어깨를 들썩거려보기도 하는데

청춘의 푸른 물이 빠진다는 건
참 쓸쓸한 사건이다


*시집, 헛된 슬픔, 삶창



 

 


생계의 적 - 박순호


복도를 오가는 구둣발
격렬한 집중 사이로 삐져나오는 신음
한바탕 토사물을 쏟아내고 내린 양변기
칸칸마다 가득 차서 흘러간다
엉겨 붙어 서식할 세계를 찾아 해적처럼 떠다닌다
부유물이 집결하는 곳은 어딜까
각자의 방에 놓아둔 가방처럼 의미가 불편하다

바퀴벌레 한 마리를 잡고 나서 불을 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이가 득실거리는 것처럼 이불 덮은 몸이 가렵다
허벅지를 북북 긁는다
놓쳐버린 잠의 꼬리

사막으로 갔나
우주로 갔나

그러다가 겨우 잠이 들면
내 몸뚱이가 개미만 해지고
거대한 가구에 둘러싸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몸이 불어나 이층 여관 벽이 터진다
아수라장이 된 여관 근방에서 나는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낀다

매일 밤 야릇한 세계로 들어가는 터널 입구
망치와 못을 놓아두기도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신경정신과 의사는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며
휴식을 취하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

휴식은 꿈도 꿀 수 없는 생계의 적이다


 

 

# 박순호 시인은 1973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2001년 <문학마을>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무전을 받다>, <헛된 슬픔>, <승부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