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늘의 노년(老年) - 박승민

마루안 2018. 7. 9. 12:01

 


그늘의 노년(老年) - 박승민


그늘은 평생 동안 자신을 벗어난 적이 없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이 되겠다는 버거운 마음도 애초에 없었다.

누군가 그늘의 넓이를 탓하며 허벅지를 발로  차기도 했지만 
누군가 그늘의 깊이를 탓하며 말뚝을 박기도 했지만
그는 삶이 원래 그러하다고만 생각했다.

세상이 던진
수십 쌈의 바늘 같은 말을 듣고 집에 와서 누운 날

우우우 우우우
그늘이 자기의 몸을 필사적으로 비틀며
한 두어 시간, 크게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침이면 그는 또 잘 마른 햇빛 한 장을 누군가에게 내민 채
마당 끝에서 골똘히 혼자 깊어만 가고 있었다.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본의 아니게 씨 - 박승민
-한식날


닭이 목이 말라 죽어 나자빠져도
물 한 모금 까딱하기도 귀찮은 박평판 씨는
결혼까지는 언감생심이었다.
다섯 살 윗길, 과부 엄 씨가

'새서울여인숙'에서 자신을 낚기 전까지는

결혼까지는 마지못해 했다손 치더라도
아이까지는 정말 아니었다.
수세미처럼 축 늘어진 자신의 영물이
올챙이 수영을 거쳐 개다리, 송장영법을 거쳐
그렇게 잽싸게 그 문턱에 터치, 하리라고는
본의 아니게 1남3녀씩이나

늘 누룩이 눈자위로 번져가는 박평판 씨는
늘그막에 관운이 온다는 소리에
한 귓구멍으로 듣고 두 콧구멍으로 흘린 바 있지만
마누라 엄 씨가 읍내에 낸 '진달래소주방'이
이태 건너 한 채씩 집을 지어 올리는 벽돌소리에
정말이지 본의 아니게 그 처녀보살의 말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관운이 재운으로 딱, 한 글자 틀렸음을

그가 죽던 날
평판 씨는 끝까지 이름 남기기를 사양했지만
부친이 이름을 지어준 관계로
박평판지묘(朴平板之墓)
마당가의 고욤나무처럼 쑥스럽게 제 이름을 펼쳐들고
본의 아니게 또 아들 딸 손자까지 불러서는 한 상 걸게 받아 넘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