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하루살이에게 속다 - 류흔

마루안 2018. 7. 5. 23:05

 

 

하루살이에게 속다 - 류흔


죽어도, 모여서 죽으면 덜 외로운지
새벽 가로등 밑에 하루살이가 소복하다
이틀을 살면 하루살이가 아니기에
하루 만에 죽으려고 안간힘을 쓴 흔적들,
하루를 딱딱 맞추어 죽기도 영 쉽지만은 않았을 터
그렇다고 두 번의 일출은 허용 않는다 이제
이들의 죽음을 강조해주던 스폿라이터가 꺼지고
하루에 쌓은 사랑과
죄와
살아 있었음의 업적이
부염한 어둠 속에 묻히지만
저녁이면 ON되는 가로등 밑에서
똑같은 얼굴로 나타나는 하루살이가
슬그머니 일어나 불빛에 매달리는
오늘 새벽에 쓰러졌던 그 하루살이가 아닐는지

하루만 산다고 눙치면서
수천수만 년을 속여왔는지도

 

*시집, 꽃의 배후, 바보새

 

 

 

 

 

 

가버린 날 - 류흔


내가 지웠던 시절의 여자와 웃음과
함부로 친절했던 세월이여
서로 바뀐 말들의
그 낯설고 덧없던 날들이여
배후를 속인 채 등 뒤에서 사랑을 겨누던
아, 철거해야 마땅한 추억이여
거짓은 용감하고 비밀은 당당했노라
고백은 혼자만의 독백,
오늘 내게 온 슬픔은 어제와 같은 종류
내일 있을 슬픔도 예측 가능한 것
이 주저앉고 비스듬한 것의 정체는 뒷모습이고
누군가 거기서 연민을 느낀다 했던가
돌려세우면 다시 웃어줄지 모른다
저렇게 창백하고 맹렬한
후딱 읽어치울 만큼 간단한 얼굴에 대해서
머금었으니 뱉어낼 구석을 찾는 입술과
입술을 가둔 말에 대해서
눈썹을 거느리는 양미간에 대해서
밤이면 삐뚤어지는 코에 대해서
돌아오는 새벽과 구겨진 넥타이의 길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만 돌려놓는 시간,
엎질러진 흔적조차 흔적 없이 사라져
이제는 가버린 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