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말더듬이 - 송경동

마루안 2018. 7. 5. 22:18



말더듬이 - 송경동



어려선 말더듬이였다
조금만 더 세상으로 나오렴
짧은 혀뿌리를 물고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너도
저 바닷가 몽돌들처럼 잘 구를 수 있을 거야
르, 르, 르 둥글게 만 혀를
수천번 굴리다보면 어느덧 둥근 저물녘


그 짧은 혀가 내 영혼의 작은 키였다
모든 위풍당당한 지배와 폭력과 선진의 언어들을
그 음운의 끝까지 거부하는 힘을
배웠다 번지르르한 말을 경계하고
세상엔 말하지 못한 슬픔들이
아직 말할 수 없는 아픔들이
오지 않은 말들이 더 많다는 걸 배웠다


지금도 혼자 있을 때면
아름다운 말들을 연습하는
나를 본다 '안녕'이라는 인사를
가장 많이 해보고 싶었다 더듬거리느라
하지 못한 말들이 아직도 많아
지칠 틈 없이 행복하다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








사적 유물론 - 송경동



한 선생이 말했다
당신은 공적인 삶에 과도하게 치우쳐
사적인 삶이 너무 없다고
그러면 죽는다고


자주 만나는 선배도 말했다
운동 이야기를 줄이고 사적 대화 비율을
최소한 칠십 퍼센트로 늘리라고
그러지 않으면 모든 관계가 말라 죽는다고


조근조근 사주를 봐주던 이는
당신은 나무로 태어났는데
사주에 물이 너무 없어
늘 목마른 생을 살아야 할 거라고 했다


사적 삶이라니, 관계론이나
역사적 정치적 생명을 들어
대들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은
어느 쓸쓸한 저녁


이기고 지는 것만이
무엇을 이루고 못 이루고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는
삶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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