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빗방울의 인칭 - 한석호

마루안 2018. 7. 5. 22:43



빗방울의 인칭 - 한석호



불 꺼진 십오 촉 알전구에
불나방이 혀를 꽂고 인공호흡하고 있다
그런다고 숨이 돌아오겠냐마는
숨을 헐떡이며 심장을 끝없이 압박하고 있다


무촉의 알전구만 고집하던 당신의
그 고함소리 버럭 달려오는 것 같아 번쩍 눈을 뜬다
30년째 마음의 변방을 떠도는 나는
빛바랜 날개로 어둠을 가만 안아 보고 있다


눈을 딱 감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저들은 땀 한 방울 흘려 본 적 없는 족속들
최초의 궁구인 들숨은 읽고
최후의 궁극인 날숨은 보지 않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는
나를 불나방이 복사하고 있다
질서 밖에서만 걸어 다니다 온 나는
나 자신에게도 읽힌 적 없는 3인칭인가 보다



*시집, 먼 바다로 흘러간 눈, 문학수첩








포커, 혹은 당신이라는 - 한석호



-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기다릴 것이다 묽은 무늬 주름치마의 물결만 가슴에 묻고 돌아와 빈 나뭇가지의 새처럼 울었다 사월은 이제 한 끗도 높지 않으므로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한때 나는 골드러시
더 오를 곳 없는 조커였지만
당신을 앓고 나서부터
어디서도 읽히지 않는 계절이 되었다


바닥으로 잘 떨어지는 방법만 오백 년
골똘히 죽는 법에 또 오백 년
그러나 결국엔 허탕 치고 맥 빠져서
우울한 샹송처럼 꽁짓돈이나 빨고 다닌다


결과는 원인을 닮는다는 주장을
수용하는 것만으로 답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적막의 몸통과 대면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행한 갑질이 뚜렷이 보이니까


모래판에서 흘린 땀은 식어 가고
어디서나 금수저를 보게 될 거라고 떠들고 다니는 A
한 번의 운을 시험하기 위해
K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세상의 모두를 갈아 내는 중이다


허무가 몸서리를 치는 지금은 골든타임
신의 한 수가 간절한 때다
희끗한 눈발의 농간에 갇힌 나의 오직은
당신을 문명의 세기 이전으로 돌려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