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따뜻한 결별 - 최세라

마루안 2018. 7. 2. 22:47

 

 

따뜻한 결별 - 최세라

 

 

낯선 차고지에서 비를 긋는다 다시는, 이란 말을 끝으로 저수지 물밑에 쌓이기 시작하는 빗방울
때로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먼 데의 총성보다 무섭게 날아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서 있는 자여, 포복

속사포에 무너져 확인사살을 기다리는 동안

깍지 낀 손 머리에 얹고 투항하는 나의 곁으로
백기처럼 하얀 개, 여러 갈래

물꼬 튼 기억들이 눈 밑 가득 붉게 흐른다

 

녹슨 오뉴월은 세월이 아니라 꿈이었던 것

마주보고 달려도 줄어들지 않던 거리는 그래서였을 것

몸 던져 바탕화면에 깔리고 싶던 모든 날 저문 채

둥지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말들이

새 떼 되어 일시에 날아오른다

 

둑방 위로 둘씩 셋씩 나타나는 반딧불은

싸움의 신호탄이 아닌 종전의 축포

 

엎드린 채 하얀 개의 녹물을 닦아준다면

조금씩 흘러가는 얼굴에 패랭이꽃 띄워준다면

 

다시는, 다시는, 떨어지는 빗줄기 뚫고서

회전문에 갇히듯

모르는 번호의 차에 실려 언젠가 돌아올 당신


*시집, 복화술사의 거리, 문학의전당

 

 

 

 

 


장마 - 최세라


그날이 우르르 몰려온다

한쪽으로 쏠리며 질주하는 천장의 쥐 떼들처럼
그날로부터 하루
그날로부터 일주일
한 달, 일 년과 16일째 되거나

내가 죽은 지 2년 89일째 되는 어느 날

 

아니면 하루살이의 전생인 어제로부터 뒷걸음질쳐

한번 꺾인 필름처럼

영사기에 걸린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지 않는,

 

그날, 내가 나에게 보내는 메일함이 넘쳐

거센소리 쏟아지고 튀어오르던 날

물처럼 금 밖으로 물러나 쏟아지는 불빛 속을 대책 없이 걷다 보면
후렴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너는 스치는 역이야 그냥 지나치는 역이야

잠깐 내려 어묵을 먹다가 구둣발로 플랫폼을 문질러보는

숱한 날들 가운데 하루야

 

빗물에 무너지는 절개지처럼 그날이 젖어서 쏟아져내리고

먼 빗줄기에 걸터앉아 오늘이 느린 템포로 시작되었다


 


*시인의 말

창문 없는 고시원 벽에
침묵이 벽돌처럼 쌓이는 귓가에

각종 고지서가 빼곡히 들어찬 우편함 속에

조그만 환기창이 되어주었다, 시집을 읽을 때면

몰락의 세월도 숨구멍을 달고 잠시 물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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