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미친 강물을 바라보며 - 김인자

마루안 2018. 7. 3. 21:00

 

 

미친 강물을 바라보며 - 김인자

 


폭풍 속 장마 지나고
다시 쏟아지는 빗속에 서서
흐르는 강물 오래 바라보았다
아무도 어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저 붉은 사랑 그리움의 미친 속도


황토 흘러가는 어지러운 강물
바다가 예서 얼마나 남았는지
반쯤 드러누워 아랫도리를 바닥에 묻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어린 자작나무에게
머리 한번 쓰다듬어주며 잠시 쉬어갈 법도 한데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강물


한때 내 그리움의 화려한 현기증도
세상 모두 휩쓸고도 남을 저 붉은 강
상처가 상처를 보듬고 간통하는
흙탕물의 미친 속도를 닮았던가


알고 보면 저것들
여리고 부드럽기 만한 황토들인데
저리 광폭한 속도에 휩쓸려가다
언제쯤 미친 그리움의 끝
굴곡진 바닥의 틈새라도
숨 가쁘게 어지러운 몸
조용히 내려놓고 쉴 수 있을까

 


*김인자 시집, 슬픈 농담, 문학의전당

 

 

 

 

 

 

 

협동이발관 - 김인자

 


미장원에서 다듬어져야 할 인생이 이발관에서 시작된 것부터 문제였다
아버지를 따라 읍내 삼거리 협동이발소 가는 날은 기분이 묘했다
파리똥이 까맣게 붙은 액자 속에는 푸쉬킨의 삶이 있었다
이발소 앞마당에는 철 따라 채송화와 과꽃이 피었다
생크림 같은 햐얀 비누거품을 얼굴에 바르고 긴 면도칼 가죽끈에
쓱싹쓱싹 날 벼리는 소리 듣던 그때만 해도 딱딱한 의장에
부동자세로 마냥 기다려야하는 게 삶인 줄은 몰랐다
이발소 아저씨는 잊을 만하면 아버지 수염은 하도 빳빳해
몇 갑절 힘들다는 말만 늘 같은 톤으로 되풀이했다
제 몸보다 몇 배 큰 건전지를 등에 업은 라디오에선 동백아가씨가 흘렀다
어린 나는 아저씨들 곁에서 발목을 까딱거리며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일본에 목을 팔았다는 소문 자자한 이미자 얼굴을 떠올렸다
이발소 아저씨는 왜 저러나 싶게 사람만 보면 굽실거렸고
온 동네 소문들은 파산을 눈치챈 빚쟁이들처럼 이발소로 모여들었다
읍내에 가는 날은 아침마다 새마을 노래가 걸음을 채촉했다
무얼 협동하라는 건지 무얼 협동해야 한다는 건지 협동이발관에서는
한 번도 설명한 적 없는 남자들의 생이 가죽끈에 무딘 면도날 벼리는
늘 같은 일상처럼 믿기지 않은 듯 믿을 수 없는 듯
사람들은 협동이발관 거울 속에서 느린 화면의 영화처럼 늙어갔다

 

 

 

 

# 김인자 시인은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겨울 판화>, <나는 열고 싶다>, <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 <슬픈 농담>이 있다. <아프리카 트럭 여행>, <걸어서 히말라야> 등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림을 위하여 - 홍신선  (0) 2018.07.03
소년 - 하상만  (0) 2018.07.03
물속의 언어 - 조인선  (0) 2018.07.02
따뜻한 결별 - 최세라  (0) 2018.07.02
광인의 여름 외투 - 김수우  (0) 2018.07.02